책을 되새김질하다

베니스에서 죽다

대빈창 2023. 9. 26. 07:00

 

책이름 : 베니스에서 죽다

지은이 : 정찬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펴낸날 2003년 2월 14일. 초판이다. 2000년대 초반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소설집 스무 여권을 한꺼번에 온라인 서적을 통해 구입했다. 그중의 한 권이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4'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교양인, 2022)에서 이 글귀를 만났다.

“나는 그렇게 사랑한다. 상대방은 나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累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낮은 자세. 이런 사랑은 쉽지 않지만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130쪽)

여성학자가 하는 일은 그의 책을 많이, 자주 사서 주변에 읽기를 권하는 것이 전부다. 또는 지역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하는 것이다. 나는 대뜸 ‘그’를 소설가 정찬이라고 짐작했다. 묵은 소설집을 다시 꺼내 들었다. 속표지에 포스트잇이 붙었다.

“내게 정찬은 숲속을 걷다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는 세상 같다. 그의 활자들은 칼춤을 춘다. 어렵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치열함을 견뎌야 한다.”(58쪽)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2'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교양인, 2020)-

여성학자는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이지만, 정찬의 작품 26권을 갖고 있다고 한다. 20여년이 세월이 흘렀다, 나는 책술에 쌓인 먼지를 떨어내고 소설집을 다시 펼쳤다. 정찬(鄭贊, 1957- )은 1983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중편 「말의 탑」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단편 11편이 실린 『베니스에서 죽다』는 그의 네 번째 소설집이었다. 낯익은 문학평론가 성민엽은 해설 「지금-여기에서 존재가 탐구하는 것』에서 말했다. “존재의 현전을 저지하는 시간을 거슬러 기억의 힘으로 존재를 찾아가는 탐색”(331쪽)을 수행하고 있다고.

「은빛 동전」은 가난한 살림에 어머니는 찹쌀떡을 만들어 식당에 납품, 심부름으로 식당에서 찹쌀떡 상자와 100환짜리 은빛 동전을 받아오다 주머니의 동전을 흘린 유년의 기억. 「깊은 강」은 나(소설가)는 주막에서 자작하는 40대의 하진우를 만난다. 필름이 끊기고, 영월 동강 어라연을 기억해내고 여행을 떠난다. 민박집 주인에게 들은 하진우는 매년 늦가을에 들어와 이듬해 4월까지 곰처럼 동면했다. 동강에 댐이 생긴다는 소문을 듣고 혼자 어라연으로 들어간 하진우가 실종.

「적멸」은 폭설이 퍼붓는 혹한에 오대산 적멸보궁을 찾아가며 청량리역에서 전화한 선배 강선중이 실종되었다. 그는 교통사고로 오랜 시간 식물이었던 딸의 목숨을 거두고 화장시켜 유골을 품에 안고 산으로 들었다. 굴곡 많은 삶을 겪은 강선중이 동자승 시절, 강주스님은 그를 데리고 적멸보궁에서 가서 입적했다. 나는 강선중이 폭설 속에 적멸보궁에 들었을 것이라고.

「가면의 영혼」은 서른두 살의 퇴역배우의 회상이다. 오셀로의 이아고 역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오이디푸스 역 제의가 들어왔다. 이아고의 가면을 벗어버릴 시간이 부족했으나, 첫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공연 마흔번 째날 이아고가 눈을 뜨면서 공연을 파국을 맞았다. 「죽음의 질문」은 작가k는 다섯 번째 장편소설을 완성하고 오랜 버릇대로 산행에 나섰다. 소양강 댐을 건너는 오봉산을 등산하고 경운산장에서 묵는데, 처녀작 ‘죽음의 질문’의 피조물 청년이 찾아와 대화를 나눈다.

「저문 시간」은 중학 2학년 제주도 수학여행, 아버지의 허락으로 일본 할아버지가 선물한 그 시절 귀하던 카메라(흑백)를 들고 떠났다. 범생이였던 나는 카메라의 힘을 빌려 우쭐거리고 싶었으나, 여행 내내 날씨는 비가 오거나 흐렸다. 그마저 여관에서 커튼을 내리고 카메라의 필름을 꺼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날아갔다. 표제작 「베니스에서 죽다」는 토마스 만의 소설 제목이다.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루치노 비스콘티가 영화화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다. 옛 제자가 오스트리아에서 보낸 비디오를 소유한 선배 L과 학림다방의 3층 별실에서 영화를 본다.

「시인의 시간」은 운동권 시인 강명원은 철학과 복학생으로 불문과 이윤희와 연인 사이. 나는 이윤희를 좋아하고 그들의 관계를 엿본다. 대학신문에 시를 발표한 후 강명원은 실종(독재정권의 소행으로 추측). 나와 이윤희는 연인으로 발전. 강명원은 이듬해 3월 캠퍼스에 나타났고, 80년 5월, 광주를 알리는 유인물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나는 여기서 시인 황지우를 떠올렸다) 강명원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이윤희는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세월은 흘렀고, 강원 홍천 산골마을을 찾아갔다. 강명원은 불치병 소뇌신경위축증으로 장님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윤희가 병수발을 거들었다.

「숨겨진 존재」는 글쓰기에 지쳐 강원 산골 관음사로 들어간 소설가는 달마도를 그리는 떠돌이 화가를 만났다. 그를 송광사 우화각에서 여덟달 만에 재회한다. 화가는 국전에 입선하고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결혼하고 자식까지 두었으나, 집도 없이 떠돌고 있었다. 「물의 길」의 나는 복개천의 노천식당에서 우뇌가 손상되어 회전의자를 돌려가며, 끊임없이 볶음밥의 오른쪽 반만 먹는 노신사를 지켜보고, 거리에는 경련하면서 몸짓과 표정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투렛증후군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소설가는 뇌신경학자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것이다)

「섬진강」은 주인공 ‘그’는 작가의 분신으로 광주항쟁을 다룬 장편소설을 출판사에 넘기고 지리산 피아골로 여행을 떠난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광주를 떠난 후에 정찬은 광주로 들어갔다. 선배 일을 도우러 피아골 산장에 온 후배는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 그는 산장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지리산을 떠도는 넋들을 위로하는 돌을 돌무덤에 얹었다. “기억은 인간으로 하여금 한번 흘러가면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강을 거슬어 올라가게 한다. 절대적 존재인 시간을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기억인 것이다.”(323쪽)

작가는 첫 작품부터 언제나 권력의 대척점에 서서 폭력적 권력에 대한 비판을 탐구했다. 지금까지의 일관된 구도에서 네 번째 소설집은 ‘시간과 기억’에 닿고 있었다. 여성학자는 2020년의 책 리뷰에서 말했다. “줄거리를 아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요?”라고 말했다. 나에게 그것은 의미보다 능력이었다. 그래서 어설픈 줄거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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