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김남주 평전

대빈창 2020. 3. 2. 06:03

 

 

책이름 : 김남주 평전

지은이 : 김삼웅

펴낸곳 : 꽃자리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 나는 자식 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 보았다 / 저만큼 고추밭에서 /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 보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시인의 마지막 시 「추석 무렵」(19 - 20쪽)의 전문이다. 김남주(1946 - 1994) 시인이 저 세상으로 떠난 지 25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들 토일이가 어느새 이립(而立)이 되었다. 시인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 198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0여년을 옥바라지하던 동지 박광숙 선생과 1989년 1월  결혼했다. 1990년 토일이가 태어났다. 시인은 아들의 이름을 노동자가 월·화·수·목 일하고 금·토·일을 쉬는 세상을 꿈꾸며 ‘토일(土日)’이라고 지었다. 1994년 2월 13일 새벽 부인 박광숙 선생과 일점 혈육 다섯 살짜리 토일이를 남기고, 시인은 49세의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다.

독립운동사·친일반민족사 연구가 김삼웅은 혁명적 민중시인의 평전을 시인의 시 100여 편을 엮어 서술했다. 책을 덮고서 알았다. 내가 시인을 처음 만난 책은 1988년 9월에 출간된 무크지 『녹두꽃』 창간호였다. 그 시절 나는 알지 못할 세상에 대한 원망과 허무에 젖어 술독에 빠져 지냈다. 지방 소도시는 늦더위가 한창이었다. 책과는 거리가 먼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낮에 서점 문턱을 넘어섰다. 그때 분단된 한반도를 앞뒤 표지그림으로 삼은 제법 두꺼운 잡지가 눈길을 끌었다. 앞표지는 불온(?)하게 판화가 오윤의 〈해방춤〉으로 장식했다. 사회과학에 무지했던 나는 처음 맞닥뜨린 생소한 용어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도대체 사회과학 이론에 사구체(콩팥에서 노폐물을 걸러내는 기관)는 무엇인가? 후에 알았지만 '사구체'는 '사회구성체'의 줄임말이었다. 무지를 탓하기보다 오기가 앞섰다. 사회과학용어사전을 손에 넣었다. 지금의 활자중독자를 만든 책과의 첫 만남이었다.

 

“강화에 나올 일 있으면 가게에 들러”

 

함민복 시인한테 전화가 왔다. 아! 선생님이 꾸러미를 가게에 맡기셨구나!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돌아오면 나는 어김없이 자연산 첫굴을 박광숙 선생님과 시인께 드렸다. 선생님은 손수 농사지으신 수확물로 빚은 건강식품을 나에게 주셨다. 궁금했다. 올해는 무엇을 만드셨을까. 작년 연말, 강화대교 초입 고려인삼센터 〈길상이네〉 가게에 들렀다. 시인 부인은 한 꾸러미를 나의 차에 실었다. 어머니는 인삼을 손질해 인삼차와 인삼무침을 만드셨다. 선생님이 마련한 올해의 선물은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라는 계피생강차와 유기농고추장에 버무린 멸치볶음이었다. 그리고 책 두 권이 종이가방에 들어있었다. 김남주 시인의 번역시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푸른숲, 2018), 김삼웅이 지은 『김남주 평전』(꽃자리, 2016) 이었다. 선생님은 번역시집을 재작년에도 주셨다. 외포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박진화 화백을 만났다. 그가 리후렛을 건넸다. 화백은 새해벽두 미국 뉴욕에서 작은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번역시집을 화백께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