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책이름 : 나의 서양미술 순례
지은이 : 서경식
옮긴이 : 박이엽
펴낸곳 : 창비
재일조선인 지식인 서경식하면 나는 디아스포라(diaspora)부터 떠올렸다. 그리스어로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켰다. ‘일찍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와 밑바닥 노동에 시달렸던 나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모습’(152쪽)이었다. 저자의 할아버지가 충청도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1928년이었다. 해방이 되고 아버지 형제들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경제적 문제로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다. 저자는 재일동포 2세였다.
‘무심코 집어든 석간신문에서 서울에 유학중인 형들이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것’(161쪽)이다. 저자의 둘째, 셋째형 서승과 서준식은 1971년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이 조작한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간첩단사건’에 휘말렸다. 서승은 서울대대학원에, 서준식은 서울대에 유학중이었다. 두 형제는 기약없이 군사독재정권의 감옥에 갇혔다. 잔혹한 고문에 못 이긴 서승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난로를 껴안아 얼굴에 끔직한 화상(火傷)을 입었다. 서준식은 손목을 끊고 자살을 시도했다. 목숨을 건 51일간의 단식을 이어갔다.
‘양친 모두 옥중의 형들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208쪽) 저자의 가족들은 20여 년간 조국의 감옥에 갇힌 두 형제를 석방시키기 위해 현해탄을 오갔다. 면회와 차입으로 조국을 찾던 양친은 두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열다섯 살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두 오빠의 옥바라지를 하며 통곡의 세월을 살아온 누이는 망연자실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서경식은 누이와 함께 일본에서 도망치듯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헤랄드 다비드 「캄비세스왕의 재판」 / 프라 안젤리꼬 「수태고지受胎告知」 / 쑤띤 「데셰앙스」 / 고흐 「거친 하늘과 밭」 / 삐까쏘 「게르니까」 / 고야 「모래에 묻히는 개」 / 레온 보나 「화가 누이의 초상」 / 중세조각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 / 부르델 「자화상」 / 로베르트 캄빈 「부인상」 / 외젠 베르낭 「성묘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
책을 구성하는 10개의 장과 에필로그까지 주제를 이끌어가는 그림들의 목록이다. 디아스포라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림들은 고난으로 얼룩진 피 흘리는 인간의 모습이 담긴 회화와 조각이었다. 저자는 가족사를 덮친 고통과 조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림과 조각을 통해 유려한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초판이 출간된 지 근 30여 년 만에 책을 펼쳤다. 앞서 셋째형 서준식의 파시즘의 폭압으로부터 신념을 지킨 양심수의 기록인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을 잡았다. 어깨를 맞댄 책은 폭력과 죽음에 굴하지 않는 인간 내면의 존엄에 관한 기록인 둘째 형 서승의 『옥중 19년』이다. 다 읽은 책을 겉표지에 싸서 형들의 책 옆에 두었다. 서승·서준식·서경식. 재일조선인 2세 삼형제에게 나의 조국은 도대체 민주주의와 인권에서 얼마나 크나큰 빚을 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