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대빈창 2021. 3. 12. 07:00

 

책이름 :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지은이 : 이지누

펴낸곳 : 호미

 

강원江原 - 진전사터陳田寺址(양양), 선림원터禪林園址(양양), 굴산사터掘山寺址(강릉). 법천사터法泉寺址(원주), 거돈사터居頓寺址(원주), 흥법사터興法寺址(원주), 한계사터寒溪寺址(인제), 물걸리 절터(홍천)

경북慶北 - 법수사터法水寺址(성주), 법광사터法廣寺址(포항), 장연사터長淵寺址(청도), 개심사터 開心寺址(예천).

대구大邱 - 대견사터大見寺址(달성).

경남慶南 - 단속사터斷俗寺址(산청), 지곡사터智谷寺址(산청), 가섭암터迦葉菴址(거창), 장수사터長水寺址(함양), 승안사터昇安寺址(함양), 대동사터 大同寺址(합천), 영암사터靈巖寺址(합천), 영원사터塋源寺址(밀양).

울산蔚山 - 간월사터澗月寺址(울주), 운흥사터雲興寺址(울주), 청송사터靑松寺址(울주), 영축사터 靈鷲寺址(울주).

 

우리나라의 폐사지廢寺址는 모두 2,000여 군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진작가 이지누의 출판사 《알마》에서 출간된 ‘절터 답사기’ 3권은 여덟·아홉 곳의 폐사지를 담았다.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은 출판사 《호미》의 ‘절터 톺아보기 시리즈’ 1권으로 강원·경상도의 절터 25곳을 실었다. 2006년 3월에 출간되었다. 2권 경기·충청·전라도 편과 3권 경주 편이 잇달아 출간될 예정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15여 년이 지났지만 책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폐사지 답사기는 불교나 미술에 관한 지식보다 지은이의 심상을 담아 낸 에세이였다. 사진작가는 빈 절터를 새벽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지켜 보았다. 때로 밤을 지새면서 한 곳에 오래 머물렀다. 적막에 휩싸인 인적 끊긴 절터는 사색의 공간이었다. 여유와 자유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사진 218점은 절터마다 잦은 발걸음과 오랜 기다림 끝에 포착한 이미지들이었다.

사진작가의 폐사지 순례는 구산선문九山禪門에 입문하면서 시작됐다. 2004년 초가을 높이라는 것에 회의를 가지며 더 이상 오르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홀로 길을 나섰다. 떠돌다가 발길이 머문 곳은 언제나 폐사지廢寺址였다. 그 떠돎은 만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신이 운수납자雲水衲子라도 된 듯 착각에 빠져들었다. 순례를 여는 첫 폐사지는 대관령을 넘는 강원 양양의 진전사터였다. 이 땅에 선불교를 열어젖힌 도의道義선사가 머물렀던 절터였다. 선종의 출현과 동시에 승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터를 보물 제349호 승탑(도의선사 승탑으로 추정)과 국보 제122호 삼층석탑이 자리를 지켰다.

굴산사掘山寺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사굴산문闍崛山門 가람이었다. 통효通曉 범일국사는 대관령 국사 성황신으로 강릉 단오굿의 주신主神이었다. 장연사터長淵寺址의 길명마을 입구 은행나무 밑에 탑 앞의 배례석이 모퉁이가 깨어진 채 세워져 있었다. 작가는 폐사지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들 중 열손가락 안에 꼽았다. 단속사터斷俗寺址의 정당매政堂梅는 조선후기 문신 탁영濯纓 김일손(1464 - 1498)의 「정당매시문후政堂梅詩文後」에 유래가 전해졌다. 여말선초 문인 통정通亭 강희백(1357 - 1402)이 심은 매화는 백여 년을 살다 죽었다. 증손 강용후가 1487년 묵은 뿌리 곁에 새 뿌리를 옮겨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지곡사터智谷寺址는 남명南冥 조식(1501 - 1572)과 제자들이 학문을 논하던 절이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호칭을 “그저 처사處士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사진작가는 부안 내소사 부도밭의 해안海眼선사의 부도비를 떠올렸다. 〈범부凡夫 해안〉. 가섭암터迦葉菴址를 찾아가는 500m 길은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유안청폭포, 아름다운 계곡의 선녀담, 나라안의 바위 중 가장 크다는 문門바위. 장수사터長水寺址는 나라 안의 그 어는 절터에서도 볼 수 없는 일주문만 남았다. 영암사터靈巖寺址에서 금당 자리 뒤 축대의 좁은 틈에 둥우리를 튼 박새 어미와 새끼들의 울음소리를 만났다.

간월사터澗月寺址에서 사진작가는 붉은 보름달이 떠오르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절터 코앞까지 거침없이 들이닥친 네온사인 불빛 때문이었다. 운흥사터雲興寺址는 불상과 탑은 없고 물은 담을 수 있는 석조가 넷이나 되었다. 목판을 새기고 종이를 만든 산중사찰이었다. 16종에 달하는 목판이 673장이나 남아 있었다. 순례를 닫는 마지막 절터 영원사터塋源寺址는 말그대로 폐사지였다. 깨진 부처님과 부도탑 그리고 탑비와 이수를 한 곳에 모아 놓은 영원사터는 폐사지라는 낱말의 뜻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절터였다.

사진작가의 발길이 닿은 25곳의 절터에서 나는 지난해 초여름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강원 원주의 폐사지 3곳을 둘러보았다. 뒤표지그림은 흥법사터興法寺址의 개망초가 흐드러진 진공대사 이수와 귀부였다. 내가 절터를 찾았을 때, 폐사지는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들꽃은 모두 뿌리 뽑히고 잔디를 입혔다. 이른 새벽 거돈사터居頓寺址의 석조유물에 잠시 눈길을 머물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둔 법천사터法泉寺址의 11세기 걸작 중의 걸작이라는 국보 제59호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찾는 발길이 바빠졌다. 거돈사터에서 하루를 꼬박 머문 사진작가의 일갈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절터롤 향하는 까닭은 절터가 목적이 아니다. 그곳에 석조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절터에 와서 그 터를 거닐어보거나 한눈에 그 터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올라 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