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시대
책이름 : 전환의 시대
지은이 : 박노자
펴낸곳 : 한겨레출판
‘오랜만의 흡족한 책읽기였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땅의 대표적 좌파 논객은 홍세화, 김규항이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 책으로 접하게 된 박노자를 가장 윗길에 놓아야겠다.’ 15여 년 전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를 잡고 긁적인 리뷰의 첫 문장이었다. 박노자(朴露子)는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 태생으로 2001년 귀화했다. 한국인이 된 지 20년이 흘렀다. 그는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책은 공저를 제외한 박노자의 23번째 한국어 저술이었다. 첫 책은 1998년의 『한국 고대 불교사』(서울대출판부)였다. 그는 매년 한 권 꼴로 책을 내는 부지런한 저자였다. 나에게 그의 열두 번째 책이었다. 나는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를 잡은 후 박노자의 책을 불을 켜고 찾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어느날 나는 박노자의 『비굴의 시대』(2014)와 『전환의 시대』(2018)를 놓친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내 방은 이제 더 이상 책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다. 하루를 온전히 소비하면서 3주에 한번 꼴로 군립도서관에 들렀다. 박노자의 책으로 『미아로 산다는 것』을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책을 잡았다. 희망도서는 5년 이내 출간이라는 부스럼딱지가 붙었다. 다행스럽게 『전환의 시대』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다. 나의 희망도서 목록에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과 『당신이 몰랐던 K』를 올렸다.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서 이 땅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올바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박노자의 책을 잡았다.
‘촛불 항쟁’으로 창출된 민주정권은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을 나름대로 경주하나 뜻대로 될 리 없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5년짜리 부덕한 ‘임금’을 잘못 뽑아 생긴 일이 절대 아니다. 대한민국의 심층구조, 기본 골격을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국은 최고부자 1%가 사유지의 57%를 소유하고, 최고 부자 5%가 사유지 83%를 소유하는 ‘현대판 대지주’ 사회였다. 자가주택 미보유 세대는 꾸준히 46-47%로 산업화된 세계에서 최악이었다. 이들은 월세나 전세를 사는 ‘현대판 소작’ 이었다. 영세사업자는 소득 절반 이상을 고스란히 건물주에 상납하는 21세기의 '병작 소작인' 신세였다.
한국은 극단적인 재벌공화국으로 매출액 기준 국내 1·2위 기업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매출액을 합치면 한국 GDP의 20%에 육박했다. 10대 재벌의 전체 매출은 한국 GDP의 80%를 넘었다. 혼맥 등으로 얽힌 가문들이 지배하는 몇 개 대기업이 한 나라의 경제를 독점했다. 헬조선의 실체는 흙수저들에게 각종 의무를 뒤집어 씌워도, 흙수저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무책임 국가’였다. ‘밑’의 계급적 자각과 투쟁이 국가를 개선시키지 못하면 헬조선의 참상은 계속될 것이다.
사회적 자원은 부와 신분을 아우르는데, 상층 2-5%가 재화와 신분을 거의 완전하게 상실하는 반면 하부의 절반 이상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는 정도를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혁명이 성공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구 삼성은 ‘인민전자공장복합체’로 공유화된다. 삼성·현대·LG 왕조의 보스들은 망명을 가지 않는 한 인민의 감시 속에서 회계사나 엔지니어로 자신들의 옛 공장에서 일할 것이다. 그 자녀들은 공장노동자 생활을 1-2년 하지 않으면 대학에 들어가기도 힘들 것이다. 구 부르조아의 몰락과 변호사, 의사 등 과거 고소득자들의 소득은 몇 분의 일로 줄어들 것이다. 전부 정규직이 된 일반 인민들은 무상의료와 무상법률서비스를 향유할 것이다.‘(29쪽) 그렇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은 대학 재벌의 탐욕으로 인한 감당할 수 없는 교육 비용, 불로소득 세력의 투기로 인한 집값 폭등으로 서민들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생지옥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기본골격은 병영사회, 여성혐오사회, 노동지옥사회, 재벌왕국, 위계와 서열의 사회였다. 돈이 지배하는 교육과 승자독식, 적자생존, 무한경쟁에서 오는 과로, 그리고 고용 불안에서 오는 공포에 휩싸인 채 오늘도 피곤한 노동자들은 마지막 안식처로 향했다. 그곳은 붉은 십자가가 빛나는 기독교 근본주의 교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