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대빈창 2022. 7. 26. 07:00

 

책이름 : 불한당들의 세계사

지은이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옮긴이 : 황병하

펴낸곳 :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 1 - 1판 1쇄 1994년 9월 / 1판 16쇄 2004년 7월. 인상적인 표지는 화가·시인 박상순의 그림이었다. 2004년 초겨울, 나는 온라인 서적을 통해 〈보르헤스 전집〉 다섯 권을 일괄 구입했다. 그 시절, 나의 독서는 한마디로 마구잡이 책읽기였다. 즉흥적인 성격은 눈에 띄는 책은 무조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보르헤스 소설에 대한 단 한 올의 기억도 뇌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장 한구석에 잠자고 있던 책들을 다시 끄집어냈다.

어느 글에선가 진중권식 소설 독법에 대해 귀동냥을 했다. ‘보르헤스의 소설을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군요.’ 그 시절 나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에 매료되었다. 막상 책을 손에 들기가 저어댔다. 자칭 진보주의자였던 나는 보수주의자 보르헤스의 글을 기피했다. 보르헤스는 페론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은 우익이 아닌 중립이 되는 것······. 나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에 대해서도 진저리를 칩니다.”(149쪽)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책의 뒷부분 대담 「보르헤스가 보르헤스에 대해 말하다」와 옮긴이의 말 「20세기의 창조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먼저 읽었다. 난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보르헤스의 소설에 가까이 가려는 나름의 독법이었다.

보르헤스 전집 1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9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었다. 노예를 탈출시켜 다시 팔아먹는 악질 노예상인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 죽은 이로 위장하여 유산을 가로 채려다 막판에 들통 난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황해에서 안남성까지 바다를 휘젓고 다녔던 중국 청淸나라의 위대한 「여해적 과부 칭」, 가장 악명 높았던 부하 천이백명을 거느렸던 뉴욕 갱 「부정한 상인 몽크 이스트맨」, 수십 명을 죽인 냉혹한 젊은 총잡이 빌리 더 키드 「냉혹한 살인자 빌 해리건」, 천황의 사신으로 아코성 성주를 할복자결케 한 일본 사무라이 시대의 「무례한 예절 선생 고수께 노 수께」, 염색기술자 문둥이로 종적을 감추었다가 얼굴에 베일을 쓰고 예언가로 나타나 통치자로 군림한 「위장한 염색업자 하킴 데 메르브」는 보르헤스가 어떤 책을 바탕으로 자기 방식대로 재구성한 소설이었다.

「장미빛 모퉁이의 남자」는 북쪽 패거리 우두머리로 〈새장수〉라 불리는 ‘프란시스꼬 레알’의 어이없는 죽음을 다루었다. 작품집에서 유일하게 기존 작품들의 ‘다시 쓰기’ 형태를 취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1954년판에 새로 첨가된 「기타 등등」은 세 개의 작은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보르헤스가 인용한 기존 작품은 엠마누엘 스웨덴보리의 「천국의 비밀」과 「진실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하여」, 「천일야화」의 제272번째, 제351번째의 밤 이야기, 돈 후안 마누엘의 「빠뜨로니오의 책」이었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연관 없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열거, 끝이 열려 있는 급작스러운 종결,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두 세계 장면으로 축약하는 등의 소설기법을 구사했다. 민중적 리얼리즘 소설에 길들여져 있던 나에게 보르헤스의 소설읽기는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선행 텍스트에서 차용하거나 변형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기성 작품의 내용·문체를 모방하여 과장· 풍자로 재창조하는 패러디(parody), 다른 작품의 내용·표현 양식을 빌려와 복제·수정하여 작품을 만드는 패스티시(pastiche)의 문제는보르헤스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