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대빈창 2022. 9. 15. 07:00

 

책이름 :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지은이 : 고마쓰 히로시

옮긴이 : 오니시 히데나오

펴낸곳 : 상추쌈

 

도서출판 《상추쌈》의 로고는 상추잎이다. 경남 하동 악양 부계마을의 귀농한 부부가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출판사를 꾸렸다. 등록한 지 10여년을 갓 넘긴 지역출판사가 펴낸 책은 열네 권이었다. 나는 그동안 『나무에게 배운다』, 『다시, 나무에게 배운다』, 『스스로 몸을 돌보다』를 잡았다.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는 군립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역사학자 고마쓰 히로시(小松裕, 1954- )는 후쿠시마 핵폭발의 충격 속에 일본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다. 아시아 민중해방운동가 마하트마 간디, 한국의 함석헌과 함께 손꼽히는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1841-1913년)의 삶과 사상을 알리는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를 썼다. 옮긴이 오니시 히데나오(大西秀尙, 1943- )도 다나카 쇼조 연구자였다.

다나카 쇼조는 에도 막부 말기 동경의 북쪽 도치기현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에 나누시(名主)로 영주의 부당한 조치에 맞서 처음 옥살이를 했다. 30대에는 영주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3년 가까이 옥중생활을 했다. 혐의를 벗고 풀려나면서 정치에 발을 들였다. 구의회・현의회를 거쳐 49살에 제1회 중의원衆議員에 오른 후 1901년 스스로 사퇴할 때까지 6선을 했다.

일본 최초의 공해 문제, 아시오 구리광산 광독鑛毒 사건에 다나카 쇼조는 모든 것을 바쳤다. 아시오 구리 광산 생산량은 아시아 최고로 일본 산업을 이끌었다. 제련소에서 뿜어내는 황산화물을 비롯한 유독가스로 인해 숲이 말라죽고 물고기가 폐사했다. 큰물이 지면서 1억 평의 옥토가 독극물에 오염되었다. 뱃속의 태아와 어린이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정부는 피해주민들을 탄압했다. 다나카 쇼조는 의원직을 내던지고 마을로 들어가 주민들과 함께 투쟁했다. 그는 1901. 12. 1. 메이지 텐노(天皇)에게 직접 상소(직소)했다. 쇼조는 직소하기 전 죽음을 각오하고 신변을 정리했다. 상소문을 작성하고 아내에게 이혼서류를 보냈다. 유서도 미리 썼다. 국회의원에서 물러난 것도 지역주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쇼조의 직소로 여론이 달아오르자 정부는 광산 아랫마을에 거대한 유수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즉 마을을 수몰시킨다는 뜻이었다. 다나카 쇼조는 예순넷의 노구를 이끌고 수몰예정지 야나카 마을로 들어갔다. 메이지 중반까지 2700여명이 살던 마을주민들은 땅을 팔고 홋가이도로 이주했다. 쇼조는 마을을 지키려 남은 19가구 주민들과 함께 끝까지 저항하다 생을 마감했다.

쇼조는 야나카에서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깨달았다. ‘먼저 자신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서 배우려는 자세가 아니면 상대도 내 얘기를 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 원리였다. 쇼조는 일찍이 근대문명에 내재된 비인간성・반생태성・반문명성을 짚어낸 사상가였다. 그는 동시대 일본 지식인 가운데 유일하게 농학농민혁명과 전봉준을 높이 평가했다.

다나카 쇼조의 삶의 방식은 無緑無私無所有였다. 생태사상가 故 김종철은 표사에서 말했다. “다나카 쇼조는 동아시아에서 근대 문명의 본질을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깊이 있게 간파한 혜안의 소유자”였다. 마지막은 다나카 쇼조의 1912년 6월 17일 일기의 한 문장이다.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