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에코의 초상

대빈창 2023. 3. 10. 07:00

 

책이름 : 에코의 초상

지은이 : 김행숙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마지막 시편과 해설 첫 쪽이 마주보는 면이 펼쳐졌다. 수많은 시집을 잡았으나, 시적 이해력이 형편없었던 나는 해설부터 읽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손에 붙은 습관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트레이드마크는 표지그림의 시인 컷이다. 시인의 모습이 단정해보였다. 눈에 익은 시인․화가 이제하가 아닌 Kivubiro의 컷이다. 촌(?)스러운 이름의 시인을 나는 대중철학자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 촉각적 자아의 사랑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는 「포옹」이라는 시로 알게 되었다.

마침 신생도서관의 시집 코너에 『에코의 초상』이 책등을 내보이고 있었다. 시인 김행숙(金幸淑, 1970- )은 1999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2014년 8월에 초판이 나온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었다. 2003년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되었는데, 평단은 ‘서정에서 일탈하여 다른 서정에 도달한 현대시의 어떤 징후’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비슷한 시기에 첫 시집을 출간한 황병승, 김경주, 김민정, 하재연 등과 함께 〈미래파〉의 일원으로 주목받았다. 시인은 기존의 서정적 자아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적 실험을 감행한 2000년대 뉴웨이브 시단의 대표 주자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시스는 빛나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님프 에코는 여신 헤라의 노여움을 사 자기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만 따라하게 되었다. 나르시스에게 사랑을 거부당한 에코는 상사병에 걸려 메아리로 남았다. 표제가 암시하듯 시인은 에코의 운명을 시적 자아의 초상으로 삼았다. 실험적인 시어와 감수성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펼쳐 온 시인의 이번 시집은 타자를 향한 탐구와 모험이 단연 두드러졌다. 시집은 2부에 나누어 69편이 실렸고, 해설은 박진(문학평론가)의 「존재 바깥에서 물결치는 ‘인간의 시간’」이었다. 표제시․마지막 시 「에코의 초상」(136쪽)의 전문이다.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 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 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