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도쿄 이야기

대빈창 2025. 5. 27. 07:17

 

책이름 : 도쿄 이야기

지은이 : 김남일

펴낸곳 : 학고재

 

80년대말 달동네 약수동 변두리 서점에서 『소설 창작의 길잡이』를 손에 넣은 것이 작가와의 첫 만남이었다.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제3회(2012년) 권정생 창작기금 수상작 『천재토끼 차상문』을 펴들었다. 군립도서관에서 산문집 『책』을 발견했다. 소설가의 신간 두 권을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한국 근대작가들의 무대를 재조명한 『염치와 수치』, 아시아의 이웃 나라 10여 곳의 도시를 여행한 기록 『어제 그곳 오늘 여기』 였다.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소설가의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시리즈 4부작이 나왔다. 군립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고, 이제 네 권을 한꺼번에 대여했다. 문학평론가 정은경은 추천사에서 말했다. “그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의 걸출한 위인이 아니라, 고심참담 조바심 내며 매일 매일을 살아내 어떤 운명의 성좌에 다다른 이들”이라고. 책은 한국 근대 문학사의 ‘풍경’이 주제였다. 대부분의 주요 작가들은 도쿄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맺었다.

고아소년 이광수의 첫 번째 소설은 메이지 학원 교지 『백금학보』에 실린 일어로 쓴 「사랑인가」. 1908년 서울로 돌아온 최남선은 우리나라 최초 순문학잡지 『소년』을 그해 11월호로 창간. 홍명희는 이반 크릴로프와 러시아 시 몇 편을 번역해 실었고, 이광수는 단편 「어린 희생」과 「헌신자」를 비롯한 몇 편의 글을 꾸준히 발표. 1881년 4월 조선시찰단 62명 파견.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 3인이 도쿄에 남이 학업을 시작한 것이 최초의 동경 유학생. 한국 문학사의 근대는 현해탄을 건너온 ‘동경 유학생’에 의해 막을 열었다.

메이지시대 대표적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의 현장』에서 말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아시아의 맹주로 떠올랐다. 도쿄는 동아시아 개화파 지식인들의 정신적 수부首府 구실. 일본은 1872년 소학교 의무교육을 실시. 21세기에 들어서면 학령기 아동의 거의 전부(1900년 90퍼센트, 1905년 95퍼센트)가 소학교에 다닐 정도.

조선인 학생이 일본의 대학이나 고등전문학교로 유학하기 위해서는 조선에 하나밖에 없던 사범학교에 들어가 예과를 졸업하거나 일본의 중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의 최종교육 기관을 고등 ‘보통’학교로 제한하려는 노골적인 우민화 정책. 1912년 10월 27일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은 여러 친목 단체들의 뜻을 모아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를 결성, 잡지 『학지광』 발간. 2·8독립선언.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등 조선의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톨스토이를 만났고, 조선에도 급속히 전파. 김억, 조명희, 나도향 등은 직접 번역 작업.

평양 출신의 신여성 김명순은 1917년 잡지 『청춘』에 단편 「의심의 소녀」로 등단. 나혜석이 미술계를 대표하는 신여성이라면 윤심덕은 음악계를 대표하는 신여성. 도쿄음악학원 최초의 조선인 학생. 평양출신 두 청년 유학생 김동인과 주요한이 의기투합하여 1919년 2월 8일 조선 최초 순문예 동인지 『창조』 발간. 창간호에 주요한은 한국 문학사 최초의 자유시 「불노리」 발표.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을 다룬 이기영의 『두만강』(1952-1961), 계용묵의 「인두지주」(1929), 유진오의 「귀향」(1929), 김동환의 장편서사시 「승천하는 청춘」(1925).

‘대도쿄’로서 새로운 모더니티를 확보한 대지진 이후의 도쿄가 시간적 배경, 염상섭의 「만세전」(1922). 직접 경험한 궁핍과 궁상을 밑천으로 삼은 계급주의적 국제주의 카프작가 송영 「늘어가는 무리」(1925), 「용광로」(1927), 「교대시간」(1930), 노동희곡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1929). 1929년 임화는 「네 거리의 순희」와 「우리 오빠의 화로」를 발표. 임화는 현해탄을 건너가 한일 무산자 계급의 연대를 주장하는 「우산 받는 요코하마의 부두」를 발표.

이상은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도쿄의 실체가 허겁지겁 서양을 쫓아가는 안달복달하는 흉내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전도는 식민지 체제 자체의 총체적 모순의 발로. 박태원의 중편 「반년간」(1933), 이태준 단편 「누이」(1929). 상대적으로 작품에 일본인을 자주 등장시킨 염상섭의 장편 『모란꽃 필 때』(1934). 김사량의 「빛 속으로」(1939), 「무궁일가「1940」.

조선 최초의 영문학자를 자임한 최재서는 일본 문학의 일환으로 조선 문학을 자리매김. 장혁주는 일어로 쓴 「아귀도」가 일본 저명 잡지 『개조』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화려한 등단, 일본에 남아 귀화. 이광수는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대일본제국의 첫 번째 신민이기를 자청. 이광수는 태평양전쟁이 아시아 10억 인구의 백성에게 황도의 빛을 입히기 위한 성전. 김용제와 유진오는 일본어는 동양에서 국제어로 국어로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 도쿄 대공습은 단일 공습에 의한 희생자 수로는 세계 최대. 1946년 1월 1일 천왕 히로히토가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선언. 최인훈의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1967-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