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 2025. 6. 24. 06:00

 

책이름 : 옥비의 달

지은이 : 박태일

펴낸곳 : 문예중앙

 

(……) // 1904년 음 4월 4일에 난 시인이 / 1941년 서른일곱 때 낳은 고명딸 / 1944년 네 살 적 아버지 / 북경 감옥으로 여윈 아이 // 열일곱 번에 걸친 투옥과 / 고문이 짓이기고 간 이육사 / 곤고한 몸 맘을 끌고 요양 아닌 / 요양을 떠돌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 육사 가고 난 원천 / 탄신 백 주년 오늘 문학관이 서고 / 집안 어른에 묻혀 네 살 옥비 걷는다 울며 / 예순네 살 옥비 웃는다 // (……) // 독도 너머 동해 / 겨울엔 눈이 눈물처럼 쑥쑥 빠지는 항구 / 치렁출렁 아버지의 무게를 옥비는 / 어떻게 이며 지며 왔던 것일까 // 달 뜬다 달이 뜬다 / 달 속을 울며 걷는 아이가 있다 / 기름질 옥沃 아닐 비非 / 간디같이 욕심 없는 사람 되라셨던 아버지 // 아버지 여읜 네 살 옥비 / 세상 여는 달보다 환한 낮달 / 일흔을 넘겨다보는 한 여자가 / 동쪽 능선 위에 고요히 떠 있다.

 

표제시 10연의 「옥비의 달」(112-114쪽)에서 3․4․5․8․9․10연이다. 소설가 김남일의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시리즈를 연이어 잡다가 『서울 이야기』에서 이육사 시인과 외동딸 ‘옥비’의 헤어지는 장면을 만났다. 시인 박태일(1954- )의 여섯 번째 시집 『옥비의 달』을 떠올렸다. 마음이 급해졌다. 독서목록에 올려져있던 다른 책들을 뒤로 물리고, 시집부터 대여했다.

기름질 옥沃 아닐 비非. ‘옥비’는 욕심 없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간디 같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 담겼다. 서른일곱에 고명딸을 얻는 시인이 100일에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청량리역에서 만난 아버지는 포승줄에 묶이고, 눈과 입만 구멍이 뚫린 밀짚 용수에 얼굴이 가리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세 살 딸에게 말했다. “아버지 다녀오마.” 그 말이 부녀간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1904-1944)은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었다. 안동 도산 원촌마을 여섯 형제(원기, 원록, 원일, 원조, 원장, 원홍)의 둘째였다. 원기, 원일, 원조도 항일투쟁사에 이름을 남겼다. 육사는 1930년 일제 탄압에 항거하는 ‘대구격문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어 수개월간 무자비한 고문에 시달렸다. 대나무로 다리 살점을 떼내는 고문으로 부인이 넣어준 하얀 솜바지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 계속 갈아 넣어야했다.

석방되자 육사는 만주로 떠났다. 1932년 10월 의열단이 중국 난징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6개월의 훈련과정을 마쳤다. 육사는 만주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43년 육사는 국내 무력투쟁을 지원하려 국내 무기반입을 시도했다. 7월 모친과 맏형 소상小祥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어린 옥비는 집안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베이징 감옥으로 이송되는 아버지를 청량리역에서 만났다. 

육사의 시신은 고문 흔적으로 온 몸이 얼룩져 있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차디찬 북경 일제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육사 탄생 100주년, 순국 60주년이 되는 2004년, 시인의 고향 안동에 〈이육사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이옥비 여사는 말했다. “삶이 시고 독립이었던 아버지를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기억해 주길 바란다.”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집 한권 없었다. 부끄러웠다. 온라인 서적을 검색했다. 시집 코너에 일제말기 광기의 군국주의에 앞장서 복무한 친일문학인의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무거운 한숨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