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몸을 풀 바다를 지척에 두고 한시름 놓다
한림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중인 외규장각터는 근대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외침에 대비해 국서(國書)의 안전을 위해 사고(史庫)를 마련하여 분산 보관했으나 임진왜란시 전주, 강화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 없어졌다. 이에 선조 28년(1595)에 전주사고의 책들을 강화부로 옮겼고, 선조 36년(1603)에는 마니산으로 옮겼으나 병자호란때 일부 수난을 겪는다. 이후 정조 6년(1782)에 강화행궁 동쪽에 외규장각을 짖고, 그동안 분산되어 있던 책과 왕실족보, 서울 궁성의 의궤, 옥책등을 옮겨 외규장각은 귀한 자료로 가득차게 됐다. 그러나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인 병인양요시 회복불능의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은 중요한 서책 200여종 340책을 약탈하여 본국으로 수송하고, 강화행궁을 완전 초토화시켰다.
강화경찰서 진입로에 ‘황사영생가터’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나는 아직 발길이 미치지 못한 황사영생가터를 들러 송해 신당리에서 북녘 산하가 강건너 보이는 301번 도로를 따라 양사를 거쳐 하점 봉천산 주변의 문화유적을 찾는 동선(動線)을 택했다. 행정구역명은 강화읍 월곳리. 비포장 도로를 따라가자 낮은 산자락에 현대식 세멘블럭으로 담장을 치고, 기와를 얹은 솟을삼문이 멀찍이 보였다. 생가터라면 당연히 한옥 기와집이거나 초가지붕이어야 할텐데라는 의문이 일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까이 다가가니 역시나 사당이었다.
안내판을 보니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된 황형선생 묘 및 신도비라고 쓰였다. 황형(黃衡, 1459 ~ 1502)은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성종 11년(1480)에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 성종 17년에 무과 중시에 급제한 이후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시 전라좌도방어사로 공을 세웠다. 중종 7년 함경도지방 반란을 진압하고 평안도,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사당 왼편에 묘가 있는데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리고 망주석과 홀을 든 문인석을 갖추었다. 묘비에는 ‘정헌대부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지훈련원사시장무공 황형지묘’라고 새겼는데, 장방형 비좌에 투구형의 이수를 갖추었다. 묘아래 약 500m지점에 신도비가 서있는데 지금은 사당 울타리 안에 갇혔다. 사당과 묘 뒤쪽에는 소나무숲이 쏟아지는 폭양을 가려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황사영생가터에 난데없이 황형장군 사당이 들어앉아 있으니. 의문은 사당 한옆에 세운 합판 팻말에 붙인 안내문을 보고 가중되었다. 창원 황씨 장무공파 문중에서는 친절하게도 이 곳을 찾는 천주교인을 위하여 황사영의 생가터는 양주군 부곡면 장흥리에서 찾으라고 일러준다. 안내문의 요지는 성인 황사영은 장무공의 12대 손으로 양주에 묘가 안치되어 있으며, 시향도 그 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강도의 맥’은 황사영의 생가터를 강화읍 월곳리 대묘동으로 적었다. 황씨 문중과 표지판을 세운 천주교 인천 교구청 그 어느 쪽이 타당한 지 미혹한 답사객은 모를 일이다.
그럼 황사영은 누구인가. 나는 학고재 신서13으로 출간된 강재언의 ‘서양과 조선’을 펼쳤다. 황사영의 백서사건은 신유교난 와중에 충청도 제천 배론의 토굴에서 북경주교 고베아에게 보낸 백서 -한자 크기의 흰 비단에 13,311자를 작게 쓴 천주교 재건책- 가 서울에서 압수된 사건을 말한다. 황사영(1775 ~ 1801)은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전의 사위로 천주교에 경도되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되자 황사영은 배론으로 도망쳐 탄압의 실상을 알리려 백서를 만든다. 오흉조(五凶條)라 불리는 이 백서에서 문제가 된 내용은 선박 수백척에 5 ~ 6만의 정예군과 대포를 탑재하여 서양의 전교선이라 칭하고, 포교 공인을 강청(무력 개교)을 요청한 부분이다. 천주교의 대탄압에 대한 반발로 행한 일이지만 명백한 반민족적인 행위였다. 황사영은 1801년 11월에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연미정(燕尾亭)은 사방이 트였는데 정자에서 바라보면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줄기는 서해로, 다른 줄기는 인천해로 갈라져 흐르는데 마치 제비꼬리와 비슷하여 이름을 얻었다. 강도8경중의 하나로 고려 고종이 시랑 이종주에 명해 정자에서 하계 강습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고, 정묘호란에는 이 곳에서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민통선 안에 있어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입구의 검문소 위병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신원조회를 하는데 대략 30분이 소요되고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 낮은 구릉위에 나무가 우거졌는데 그 속에 연미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연미정 답사를 포기하고 해변 철조망을 따라 난 길로 들어섰다.
길은 제 몸을 풀 바다를 지척에 두고 한시름놓아 유장한 흐름을 보여주는 강 하구를 끼고,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인 들판 사이를 달려갔다. 얕으막한 산자락에 등을 기댄 정겨운 시골마을이 드문드문 나타나 한가로운 정경을 연출하지만 강건너로 시야를 옮기면 나는 ‘의식의 정전현상’을 일으킨다. 북녘땅...... 80년대를 대학생활로 보내면서 제 나름대로 역사적 임무를 자각하고 민중의 삶에 두발로 올곧게 서고자 몸부림치던 나는 돌연 이곳에 오면 사고가 마비된다. 그렇다. 이데올로기의 상전벽해를 실감하는 21세기의 전야.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을 느낀다. 돌연 지금 달리는 길을 벗어나고 싶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