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산중에서 사냐고 묻거든
책이름 : 왜 산중에서 사냐고 묻거든
지은이 : 정찬주
펴낸곳 : 비채
우리나라 최고의 암자 전문가로 알려진 작가의 암자 답사기와 불교와 연관된 고사를 풀어쓴 어른동화의 대부분을 나는 갖고있다. 하지만 근래들어 저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었다. 온라인 검색창에 정찬주를 두드리고, 신간서적이 보이면 가트에 담았다가도 정작 주문시에는 삭제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책을 고르는데 있어 저자에 대한 편집증적 기질이 유난히 강한 나의 이러한 변화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이 책을 읽어 가면서 변화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 정찬주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고승들의 삶을 소설화했다. '산은 산 물은 물'은 누구나 알다시피 성철 스님의 법어이듯이 스님의 일대기를 그렸고, '야반 삼경에 촛불 춤을 추어라'는 현대 불교계의 큰어른 경봉스님의 삶을 소설화했다. 저자는 현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철감선사 부도와 삼층 목탑 형식의 대웅전으로 유명한 쌍봉사가 있는 전남 화순의 산자락에서 6년째 산중생활을 하고있다.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산중에 목재로 지은 집이 이불재(耳佛齋)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솔바람으로 시비에 집착하는 귀를 씻어 불(佛)을 이룬다'는 뜻을 담고있다. 그 6년간의 산중 생활의 일상을 그린 글들이 '소박한 삶'과 이 책으로 묶여, 독자를 찾았다. 머리말에서 지은이는 출판사가 '산중에서 살다'로 제목을 정한 것을, '왜 산중에 사냐고 묻거든'이라고 의견을 바꿔 보낸 이유를 '네 방식의 삶과 내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들이 꾸밈없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럼 글쓴이는 산중생활을 도모하는데 있어, 왜 지금의 자리를 선택했을까. 지은이의 대학시절은 70년대였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구현을 외치며, 전 국토의 병영화를 완성한 유신정권이 총통제(?)로 종신집권을 노리며 극악을 떨친 때였다. 모든 실존주의자들을 남산 중정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가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산송장을 만들었다. 피끊는 젊음은 불의에 저항한다. 그 답은 캠퍼스에 군화발을 진주시킨 위수령이었다.
나의 글을 읽으면서 개발독재에 신음하던 민중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한강의 기적'(?)을 연출한 독재자에게 몽롱한 향수를 느끼는 시대착오적인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한 개별적 존재의 현실 인식이 그처럼 파탄났다면 어쩔수 없지 않은가. 그때 저자는 '대학교정에 군인들이 점령군처럼 거주'하는 서울을 떠나 폐사 직전의 쌍봉사를 찾았다. 이런 저자의 관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사고는 이 책 곳곳에서 눈에 뜨인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분들에게 사치를 부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순간을 깊이 명상한다면 세상은 더없이 미소지을 만한 곳이다.' 이처럼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뜬구름처럼 명상(?) 속에서 부유하는 저자의 글에 나는 반박하고 있었다. 땀흘려 농사 지어봤자 늘어만 가는 빚에 농약을 손에 쥔 농부에게, 피곤한 몸으로 잔업을 하지만 가족 생계에도 못미치는 턱없는 임금에 몸에 불을 붙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푸른 하늘은 오히려 황사 낀 대기처럼 누렇게 보일 뿐이다. '산 속에서 잃어버린 내 안의 나를 찾고 싶다.'는 저자의 말에 수긍보다는 반감이 앞선다. 자신의 성채속에 파묻힌 지은이의 욕심이 사납게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