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2025년 을사년乙巳年, 정월대보름

대빈창 2025. 2. 13. 07:30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을사년乙巳年 정월대보름 새벽 5시였다. 부엌으로 나가 밥솥에 앉힐 쌀을 씻었다. 빈 내솥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어제 저녁 감나무집 형수가 오곡밥을 지어와 보온에 맞추어놓았다. 괜한 덧일을 했다. 심야전기보일러 순환모터가 또 말썽이다. 현관문을 열자 어두운 하늘을 빗겨 눈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정월대보름, 김포 한들고개 언덕집에 살 때, 어머니는 텃밭에서 짚단에 불을 붙여 달님에게 막내아들의 소원을 비셨다. 설날 때 먹다 남은 딱딱하게 굳은 가래떡을 짚불에 구워먹었다. 

풍랑·강풍 특보로 설연휴 이틀동안 카페리호가 결항되었다. 설날 아침 객선이 출항했다. 작은형한테 전화를 넣으니, 치핵이 또 말썽이었다. 차린 음식만 저녁배로 보내고 작은 형은 인천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주문도에 삶터를 꾸린 지 처음으로 두 모자母子가 찾아오는 가족 없이 쓸쓸하게 명절을 보냈다. “올해는 개 설 쇠듯 하는구나” 어머니가 밥상머리에서 말씀하셨다. 한달 전이었다. 어머니가 점심을 드시고 식탁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셨다. 이틀이 지나자 당신은 통증을 호소하며 하체를 움직이지 못하셨다. 나는 애가 달았다. 짙은 안개로 객선은 아침부터 결항이었다. 주문도 살곶이발 4시25분 막배가 그나마 떴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저녁 7시였다. 통증을 호소하시는 머리와 고관절 부위을 여러번 CT와 X-ray를 찍었으나 이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셨다. 자정이었다.

어머니의 입원수속을 밟았다. 다음날 회진시간 담당의사는 말했다. “우리가 해 드릴 것이 마땅히 없습니다.” 어머니는 섬으로 돌아오셨지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셨다. 10여년전 수술하셨던 고관절부위의 통증을 호소하셨다. 나는 다짐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렸다. 열흘이 지났을까. 문득 깨달았다. 어머니의 침대다리 밑에 네 장의 블록벽돌을 괴었다. 어머니는 힘겹게나마 혼자 힘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셔서 워커를 끄셨다. 나는 한시름 놓았다. 작은형은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하지만 어머니 곁에 붙어 있을 여력이 없었다. 나는 독서시간을 줄이고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렸다. 어머니께 요양병원을 은근히 권했다. 당신은 서럽게 눈물을 쏟으셨다. 나의 생각이 너무 가벼웠다. 뒷집 형수가 말했다.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은 정신줄을 놓으셨을 때 입원시켜드려야 된다고. 맞는 말이었다. 다행스럽게 어머니는 정신은 온전하셨다. 온라인으로 국민건강보험에 장기요양신청을 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개 설쇠듯 한다’는 ‘개 보름쇠듯 한다’가 올바른 표현이었다. 옛부터 대보름날 개에게 밥을 주면 개가 자라지 못하고 바짝 마르고, 파리가 꾀어 더러워진다고 한다. 정월대보름 날은 개가 먹이를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굶어야 하는데, 속담에 끼니를 자주 거르는 것을 가리켜 ‘개 보름쇠듯 한다.’고 했다. 2025년 정월대보름은 종일 날이 궂었다. 아침나절까지 퍼붓던 함박눈이 진눈깨비로 변하더니 정오가 지나면서 잦아들었다. 주문도 적설량은 4센티미터였다. 오후 내내 해무가 섬을 에워쌌다. 월출시각은 5시 47분이었다. 저녁 산책에 돌아오면서 동녘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않았다. 7시가 되어서야 보름달이 구름을 빠져나왔다. 나는 손전화를 들고 옥상 슬라브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