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뒷산이 하하하
지은이 : 이일훈
펴낸곳 : 하늘아래
나의 독서여정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들은 건축가였다. 너무 머뭇거렸다. 오늘 잡은 책은 건축가 이일훈(1954-2021)의 에세이였다. 15여년전 생태에세이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사문난적, 2011)와 인연이 닿았어야 했다. 『뒷산이 하하하』(2011)는 건축가의 ‘녹색철학’과 ‘사람의 삶’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의 깊이가 돋보이는 산문집이었다. 건축가의 대표작은 공동체문화 회복을, 건축에 고스란히 녹여낸 인천 만석동 경인선 철로변의〈기찻길옆 공부방〉(1998) 이었다. 군립도서관을 검색했다. 『사물과 사람 사이』,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 떠올랐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은 동네와 오랜 세월 함께 한 뒷산이 만나는 풍경, 2장은 뒷산에 있는 약수터와 그 주변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3장은 뒷산 약수터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1장 뒷산은 맛있어. 뒷산의 이경異景-철사와 전깃줄로 꽁꽁 묶은 돌무더기, 구의회의원 출신의 동네 열 바퀴, 날아가는 비행기의 옆구리를 볼 수 있는, 만국기 펄럭이는 배드민턴 코트, 눈 무게로 처진 그물망. 동네와 뒷산의 경계, 마지막 전봇대에 붙은 정중한 유혹 쪽지. 약수터 뒷산의 텃새 오색딱따구리. 약수터 주변 나무줄기에 두른 끈끈이에 잔뜩 붙어 죽은 주홍날개꽃매미. 약수터 뒷산 불법농사 울타리는 폐기물 재활용. 약수터 뒷산은 생태적 상호연관성이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 텃새 중 가장 큰 새는 꿩. 식생분포 상태가 빈약한 숲을 알려면 나무의 정보를 지형 정보와 함께 수록하는 도감을 만드는 것. 서울시 양천구 신월7동, 경기 부천시 오정구 작동, 서울시 구로구 궁동, 세 개의 구區가 만나는 약수터 뒷산의 이름 없는 봉우리. 회비를 내야 운동할 수 있는 체육회가 운영하는 뒷산 꼭대기의 100여 점이 넘는 운동기구. 사람들이 재미삼아 주워가는 도토리로 식량이 줄어든 다람쥐. 궁동에 조선 선조의 일곱째 달 정선옹주의 묘, 작동에 조선 성종의 다섯째 딸 경숙옹주의 묘. 올라가고 내려가는 다람쥐(細虎)가 새겨진 무덤 앞에 세우는 2미터 남짓의 돌기둥 망주석望柱石. 백년약수터 뒷산 마루금을 따라 내려가면 절골약수터. 보온물통 하나에서 시작하여, 보관창고까지 세운 약수터 코앞 커피장사. 약수터 뒷산 건너 한쪽 비닐하우스 무허가주점, 말뚝을 중심으로 목줄의 길이와 개의 체장(몸길이)을 더한 길이로 반지름을 이루고 쌓인 개똥.
2장 맛있으면 약수터. 약수터 뒷산 농사짓던 오래된 마을에 우후죽순 들어선 오리요리 음식점. 승마연습장 규정을 어기고 산길을 달리는 말. 서로 쉰 걸음이 되지 않는 거리의 세 곳 약수터 위에서부터 백년약수터, 휘문약수터, 연희약수터. 약수터 글씨의 특징 중 하나 맞춤법 틀리기. 구청의 수질검사에서 부적합 판정받은 휘문약수터, 폐쇄된 약수터는 환경이 썩어간다는 확실한 징표. 약수터보다 높은 곳에서 흐르는 물길이 깨끗해지면 저절로 살아나는 약수터. 한반도 서해안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곤파스로 동네 뒷산의 뿌리 뽑힌 나무들. 약수터 뒷산의 각종 ‘금지’ 팻말은 이용자의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 관리자의 편의를 위해 오용·남용. 약수터 주변의 친목회·약수회·체육회가 관리 운영하는 시설들은 대부분 불법 시설물. 백년약수터는 최근 3년간 수질적합판정을 받은 시내 약수터 10곳 ‘서울시 으뜸 약수터’의 한곳, 서울시가 선정한 ‘걷기 좋은 길 110곳’에 포함된 지양산, ‘서울 생태문화길 우수 코스 30선’에 선정. 약수터 뒷산 군부대 훈련장 참호의 인민군 초병 플라스틱 허수아비. 백년약수터 위쪽 넓은 밭은 무허가 농장으로 불법경작지대. 폐품으로 재활용한 불법경작 밭의 멋진 농막 밭집.
3장 약수터는 짜릿해. 밭에 배낭을 두고 내려와서 물 받으려는 할아버지를 물통 도둑으로 몰아붙인 할머니. 약수터 대화의 특징은 대화 시간이 길어도 진지한 대화는 없고 아무 생각 없이 뱉는 대화가 대부분. 약수터엔 가끔 푼수도 나타나지만 한 술 더 뜨는 고수도 등장. 빈 페트병을 씻어 말리고, 깜박하여 배낭에 들고 온 일고여덟개의 뚜껑없는 페트병. 물만이 아니라 모든 맛은 닿는 혀보다 보는 눈이 먼저 맛을 보는 것이라 음식과 그릇이 중요. 영악하게 딴짓을 하며 자기실속을 챙기는 사람. 물맛의 기준이 ‘무미’로 되어있는 것은 잡스런 맛이 일절 없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이 맛의 기준. 약수터는 물 받는 단순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 받는 이의 심성이 드러나는 장소. 전국 약수터의 불문율은 물 받는 사람보다 마시기만 하는 사람이 항상 우선. 약수터 대화의 특징 중 하나는 한 얘기 또 하기.약수터의 선착순은 물통 놓는 순서대로 물 받는 게 철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