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390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햇빛들이 깨어져 모래알이 되고조개들은 그 빛의 알갱이로 집을 지어파도에 마음을 실어 보냈다가다시 불러들이던 섬 밥 묵어라 어둠이 석양 옷자락 뒤에 숨어죄송하게 찾아오는 시간,슬쩍 따라온 별이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 달빛 계곡 꿈을 꾸면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 앞장세워 돌아오듯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여린 삐비꽃을 씹으며애들 소리 사라진 언덕에 앉으면 석양은머리가 하얀 사람들 애벌레처럼 담긴 마당에관절염의 다리를 쉬다 가고빚으로 산 황소가 무릎을 꺾으며경운기 녹슬고 있는 묵전을 쳐다보는 곳그대가 파도 소리에 안겨 젖을 빨던그 작은 섬으로 p.s 전남 완도 출생 시인 김일영의 등단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전문이다. ..

입하立夏의 버드나무

버드나무는 천안삼거리의 능수버들이 가장 잘 알려졌다. 물가에 길게 늘어져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은 아름다운 풍치로 유명했다. 우리나라의 버드나무는 40종류가 넘었다. 버드나무과 버드나무속에 속하는 활엽수였다. 갯버들 같은 관목과 버드나무나 왕버들 같은 교목도 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자라는 콩버들은 바닥을 기어, 키가 한 뼘도 넘지 못했다.왕버들은 튼실하고 오래 살아서 정자나무로 남아 노거수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남 장성의 수백 년 묵은 왕버들은 귀류鬼柳라고 불렸다. 비가 오는 밤이면 나무는 빛을 냈다. 이는 인P 성분이 내는 빛으로 사람들은 귀신불로 귀신나무라고 불렀다. 오래 묵은 나무답게 전설이 전해 내려왔다. 도둑이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 하지만 나무 밑에 버리지 않으면 밤새 도망쳐도 나무 밑을..

멧새의 절망

바야흐로 절기는 곡식을 깨우는 비가 내린다는 곡우穀雨를 지나 여름이 성큼 다가선다는 입하立夏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열년 열두달 대빈창 바위벼랑을 반환점으로 삼은 산책은 오늘도 여지없습니다. 날이 궂지 않은 이상 하루 세 번 식후 산책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절기는 신록이 무르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하루 산책에서 만나는 새의 숫자는 수십에서 수백 마리는 족히 될 것입니다. 계절별로 만나는 새들을 텃새와 철새를 불문하고 나열하면 노랑턱멧새, 종다리, 박새, 오목눈이, 곤줄박이, 동고비, 까치, 직박구리, 멧비둘기, 딱따구리, 흰뺨검둥오리, 소쩍새, 매, 괭이갈매기, 방울새, 까마귀, 딱새, 뻐꾸기, 중대백로, 물총새, 파랑새, 제비, 휘파람새, 찌르레기, 황로, 노랑부리백로, 후투티, 두루미, 청둥오리, ..

품격 있게 나이 먹는 법

제22대 총선 사전투표 첫날. 아침 8시경 나는 혼자 투표장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아흔 둘이셨다. 작년 초겨울 당신은 파킨슨 진단을 받으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 가누기도 힘겨워하셨다. 어머니는 생전 처음 투표 기권을 하셨다. 서도면 투표 장소는 주민자치센터였다. 집에서 오솔길로 걸어 5분 거리였다. 나의 고향 김포에서 투표소는 한때 외벽을 맞댄 마을회관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가까운 투표소였다. 어머니의 고향은 관음도량 보문사로 유명한 석모도로 행정구역은 삼산면이었다. 90년대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미법도는 전국에서 가장 빨리 투표를 완료했다. 스물댓명의 유권자들은 미리 줄 서있다가 6시 투표가 개시되자마자 바로 투표를 했다. 작은 섬은 선거철만 돌아오면 뉴스를 탔다. 지금은 배를 타고 본섬..

뒷집 새끼 고양이 - 44

위 이미지는 2024. 4. 7.(日) 아침 7시경, 구덩이에 들어간 고양이들의 주검이다. 눈물 많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물기가 차올랐다. “고양이들이 쥐를 잡는데 어쩌자고 약을 놔서” 어둠이 가시지 않은 5시에 눈이 떠졌다. 밥솥에 밥을 앉히고, 독서대 위에 읽던 책을 펼쳤다. 바다를 향햔 창문이 점차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을 혼자 먹고 산책에 나섰다. 차 밑에 노랑이가 길게 누워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보일러실 앞 땅바닥에 얻어먹는 길고양이가 모로 누웠다. 밤에 약을 탄 음식물을 먹고, 목이 타서 뒤울안 수돗가로 가다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어머니를 불렀다. 흰순이가 보이지 않았고 희망이 피어올랐다. 가장 정이 많이 간 녀석이었다. 그래 흰순이는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 뒷집형수께 전화를 넣..

가무락 맑은탕이 밥상에 오르려면

아침부터 날씨가 고약했다. 섬의 봄 날씨는 변덕이 유달랐다. 강풍으로 풍랑이 심했다. 용케 아침 7시 주문도 느리항 1항차 삼보12호가 출항했다. 섬에 더불어 진군한 안개와 황사로 대기가 뿌옇다. 빗줄기마저 오락가락했다. 2항차 11시배는 결항되었다. 점심이 지나면서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몸에 밴 낮잠에서 깨어났다. 바지락 채취를 할지도 모르겠다. 감나무집 형수가 며칠 전부터 갯벌 일을 나간다는 소식을 어머니한테 들었다. 앞장술 해변으로 향했다. ‘장술’은 모래가 쌓여 백사장이 길어 파도를 막아 주는 언덕이라는 뜻이었다. 주문도 큰마을 진말의 앞뒤 해변의 이름이 앞장술, 뒷장술이었다. 마침 ‘박사장’이 제방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섬에서 평판이 좋은 양반이었다. 주문도에서..

논 세 필지

바야흐로 절기는 태양은 적도 위를 똑바로 비추고, 지구상에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이다. 지난겨울은 눈도 많았고, 기온이 크게 떨어진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어 동장군이 기세를 떨쳤다. 겨우내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흙살이 부드러워졌을 것이다. 이미지는 대빈창 다랑구지 들녘이다. 나는 지주地主였다. 우리 논 세 필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899㎡, 2582㎡. 783㎡. 10평이 부족한 1,300평이었다. 며칠 전부터 우리 논을 부칠 마음을 드러냈던 배너미 형님 댁을 찾아갔다. 문이 잠겼다. 전화를 넣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뭍에 출타중이었다. “형님이 우리 논 부치시죠” 작년까지 논을 부치던 뒷집 형이 쓰러져 대처의 대학병원에 입원한 지가 반년이 흘렀고 끝내 저 세상으로 떠났다. ..

복수초가 피어나다.

우리집 뒤울안 화계花階에 복수초가 피어났습니다. 재작년 늦봄에 여섯 포기를 이식했습니다. 작년에는 뿌리를 내리느라 기력을 소모했는지 다섯 포기가 줄기만 올렸습니다. 주문도에 삶터를 꾸린지 16년만의 경사입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복수초가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샛노란 꽃잎을 활짝 펼쳤습니다. 밑부분에 줄기집모양의 비늘잎이 몇 개 붙어있습니다. 복수초福壽草는 생명력이 강인하여 오랫동안 사는 풀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미나리아재비과 여러해살이풀로 땅속뿌리줄기는 짧고 수염뿌리가 많았습니다. 개화는 2-4월로 꽃이 피고 나서 줄기는 더 크게 자라고 가지를 뻗친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양치식물의 줄기와 잎을 닮았습니다. 꽃의 지름은 3-4센티미터 정도로 원줄기 위에 한 개 씩 달리며 가지가 갈라져서 두세 개씩 피기..

대빈창해변 전망대

서도면西島面은 서쪽에 있는 섬이란 뜻으로, 강화군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면이다. 면소재지 주문도는 면적 4.6㎢, 해안선 길이 12.6㎞이다. 서도의 유인도 4개 섬에서 크기는 볼음도, 주문도, 말도, 아차도 순서였다. 주문도는 봉구산(해발 147m) 남쪽에 취락이 집중 분포되었다. 진말부락이다. 부락앞 들녘은 살꾸지로 이어지는 간석지였다. 인구수는 150세대에 350여명이지만 주소를 섬에 옮겨놓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섬 이름은 조선후기 명장 임경업(선조27-인조24년) 장군이 명나라에 원병수신사로 떠나면서 항해가 순조롭지 않은 사정을 인조에게 문서로 올리면서 비롯되었다. 아뢸奏를 써서 주문도奏文島였으나 세월이 흐르고 주문도注文島가 되었다. 강화도와 서도를 오가는 카페리호의 안내 방송에 주문도는..

지혜의 숲

30여 년을 넘어선 나의 독서여정은 도서관과 거리가 멀었다. 자칭 활자중독자로 군립도서관을 찾게 된 계기는 내 방 책장에 더 이상 책을 들여놓을 공간이 부족해서였다. 그 후 나는 부피가 얇은 시집을 온라인 서적을 통해 손에 넣었고, 그 외 책들은 도서관에서 대여했다. 《강화군립도서관》에서 발행한 〈책이음 전국 공공도서관 이용증〉을 꺼내들었다. 발행일자는 없고 회원번호만 적혀있다. 첫 대출일자가 2019년 6월 13일이었다. 이날 회원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뒤 나는 3주 간격으로 읍내에 발걸음을 했다. 도서 대출기간은 2주였고, 홈페이지에서 1주 반납연기를 신청할 수 있었다. 도서관 한 곳에서 다섯 권을 대여할 수 있다. 강화군공공도서관은 강화읍에 《강화도서관》, 선원면에 《지혜의숲》, 내가면에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