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시인과 선창에서 막걸리를

대빈창 2025. 1. 10. 07:30

 

도선 삼보12호는 아차도, 볼음도를 거쳐 서도 군도를 빠져 나와 석모도와 화도 장곶 사이 좁은 해협을 가로질러 강화도에 닿았다. 예전 삼보해운 배들의 정박지는 외포항이었다. 교동도와 석모도에 다리가 놓였고 항구에 모래가 쌓이면서 외포항은 선창의 기능을 잃었다. 주문도에서 석모도 어류정항까지 1시간이 걸렸다. 이쯤이면 몸이 굼실굼실한 승선객들은 객실에서 일어서 바깥풍경을 보기 마련이었다. 객실창을 통해 마주보이는 강화도 포구가 건평항乾坪港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 가는 길이었다. 걸음걸이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나는 2층 객실에 올라가지 않고 내내 차안에 있었다. 마주보이는 건평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머니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건평이구나! 하셨다. 당신은 그 시절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외삼촌은 큰 선박을 운영하셨다. 그는 아주 부자였고, 해방정국에서 사회주의자였다. 외삼촌 가족은 극우 파시스트 등쌀에 못 견뎌 모든 가족이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외삼촌은 ‘빨갱이’였다. 그 분은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지식인이 틀림없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온 집안은 풍비박살 났을 것이다. 연좌제가 살아있었던 그 시절, 가족들은 이 땅에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 수밖에, 아니 목숨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시인은 선창에서 막걸리를 마셨을까. 건평항에 잇대어 〈천상병귀천공원〉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KCIA)가 발표한 사건은 작곡가 윤이상, 이응로 화백, 천상병 시인 등 194명이 연루된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단 사건이었다. 박정희 군사독재는 6·8부정총선 규탄시위를 무마할 정치적 목적으로 ‘동베를린(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고문·조작했다. 이 땅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선생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열망한 죄(?)로 독재정권의 핍박에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문자추상의 화가 고암 이응로(李應魯, 1904-1989) 선생은 2년반동안 옥고를 치렀다. 시인 천상병(千祥炳, 1930-1993)은 대학 친구가 동베를린에 갔다 온 것이 빌미가 되어 모진 전기고문 끝에 간첩임을 허위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공원 벤치에 앉으면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 해협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공원에는 천상병 시인의 대표시 「歸天」을 자연석에 새긴 시비가 서있다. 강화도 진강산 진강목장에서 키웠다는 조선 효종의 명마 ‘벌대총’ 이야기.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생뚱맞게 플라스틱 마네킹 ‘어린 왕자’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걸리병과 잔을 양손에 든 시인의 청동조각은 2017년 이상희 작품이었다. 시인은 길거리에서 문단 동료들을 만나면 손을 내밀고 천원을 반강제로 징발했고, 그 돈으로 막걸리를 사 마셨다고 한다.

바람이 몹시 심하던 날 건평항에 발걸음을 했다. 물량장에 어판장과 횟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만약 내가 시인을 만났으면 건평항 횟집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시인 안도현은 「병어회와 깻잎」에서 군산 째보선창 주모를 얘기했다. 막걸리를 시켰는데 안주로 병어회가 나왔다. 주모는 깻잎은 뒤지어 싸먹어야 까끌거리지않는다고 일러주었다. 강화도 병어는 보리가 누르슴하게 익어갈 때가 제철이다. 병어는 뼈째 쓸어야 고소한 맛을 살릴 수 있다. 시인에게 강화도 장수막걸리와 깻잎에 얹혀진 고소한 병어회를 대접해 드렸으면 여한이 없었겠다.

그 시절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를 다닌 수재였다. 시인의 천원과 막걸리 타령은 모멸만 안겨주었던, 국가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제스처였는지 모르겠다. 시인의 삶 자체가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무기였다. ‘동베를린 사건’으로 심한 고문을 당하고 시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날은―새」는 고통스런 기억을 문학사에 새긴 작품이었다.

 

이젠 몇년이었는가 / 아이론 및 와이샤쓰같이 / 당한 그날은…… // 이젠 몇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 네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는쪽이 강자인가를…… // 내 마음 하늘 / 한편 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펴다.

'대빈창을 아시는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년 갑진년甲辰年, 마지막 해넘이  (25) 2025.01.02
길상작은도서관  (35) 2024.12.26
일미식당의 생선구이  (40) 2024.12.09
건평돈대에서 바다를 보다.  (37) 2024.12.02
계룡돈대에서 바다를 보다.  (7) 2024.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