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江都를 가다 29

에필로그 : 강도(江都)를 가다

강화도는 볼만한 자연풍광이나 문화유산이 섬 곳곳에 산재해 있어 ‘작은 국토박물관’이라 한다. 나의 강화도 답사는 문화유산에 대한 부족한 안목과 시간에 쫓겨 겉핡기식으로 훑어 볼 수 밖에 없었다. 강화도는 선사시대 유적부터 근세 국방유적까지 즐비하다. 화도면 동막리 큰말 해안가의 빗살무늬토기 유적지와 하점면 삼거리의 북방식 최대 고인돌. 단군설화가 살아 숨쉬는 정족산의 삼랑성과 마리산의 참성단. 불교유적으로 전등사와 정수사, 오련지 설화의 청련사, 백련사, 적석사, 황련사 그리고 삼산섬의 보문사. 강화천도기의 고려궁터, 홍릉, 가릉. 조선시대의 강화읍성과 교동향교, 김상용 순절비. 국방유적으로 광성보, 초지진 그리고 삼암돈대 등. 하지만 나의 여정에서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역적..

마리산에서 백두산과 한라산의 거리는 같다

마리산은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잡아 산정에서 남쪽 한라산과 북쪽 백두산까지 거리가 같다. 나는 전등사를 찾아가는 길 초입의 삼랑성을 지나면서 고려무신 최씨정권이 강화 천도의 정당성을 백성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삼랑성을 성역화시켰다는 글을 인용했다. 그 글은 마리산도 같은 역사적 의미로 설명했다. 마리산(摩利山)은 범어(梵語) 태양빛(日光)을 음역한 마리지천(摩利之天)이 거주한 산이라는 뜻이다. 마리지천은 신통한 능력으로 형상을 숨기고, 중생의 고통을 소멸시켰다. 그런데 마리지천은 제석천의 권속으로 손자에 해당되어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단군설화의 건국신화와 그 느낌이 일치하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유추했다. 또한 참성단은 조선 숙종32년(1706)에 선두포언을 쌓기 이전에 하나의 섬이었으므로 ..

강화도의 간척 역사는 800년이 되었다

강화는 지리적 위치상 개성, 서울 등 왕도의 목구멍에 해당하여 “인후지지(咽喉之地)”라 한다. 그러기에 전란을 겪을 때마다 전략적 요충지로 요새화되었다. 그런데 요새화는 관방시설의 구축도 필요하지만 장기전에 있어 병참기지의 기능이 필수적이다. 고려 무신정권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했다. 그때 강화도에 모여든 난민들의 수는 4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이 급증한 인구를 부양할 막대한 양의 식량문제가 현실적으로 대두되었다. 800년간 지속된 간척사업으로 강화도는 전국 다섯번째로 큰 하나의 섬이 되었다.복잡했던 해안선은 지속적인 간척으로 단순해졌으며, 강화도는 130㎢의 간척평야가 조성되었다. 현재 강화도의 총면적은 424㎢으로 경지 가운데 논면적이 76%를 차지하여 해발 10m 이상의 계곡 충적지논을 제..

남장포대는 강화도의 제일 포대였다

남장포대로 향하는 숲속 오솔길을 걷는데 바다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물살이 좁은 해협을 빠져나가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마치 신미양요 때 조선군의 포격에 아우성치는 미해군의 비명처럼 들렸다.강화도는 지형을 따라 쌓은 성이 동북에서 동남까지 16km에 이르렀는데, 그중 9개의 포대중 이곳 남장포대가 강화 제일의 포대였다. 그것은 자연적인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적의 눈에 뜨이지 않은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나는 덕진돈대를 찾아 바닷가 언덕에 세워진 향토유적 제9호인 경고비(警告碑)앞에 섰다. 이 비는 외국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 고종 4년(1867)에 대원군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 비는 장대석 지대위에 기단을 만들고 높이 147cm, 폭 53cm, 두께 28cm의 대리석 비신을 세웠다. 전면에..

사리를 나누어 다섯 절에 승탑을 모셨다

향토유적 제9호 함허대사 부도는 정수사 진입로 돌계단을 올라와 요사채 뒷편 잡초 우거진 공터를 지나야 한다.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줄기를 하늘로 향해 치뻗친 잡목숲 사이로 난 산길로 들어서는데 누렁이 한마리가 낮선이를 만나 극악스럽게 짖었다. 조금 오르면 낮은 야산자락에 부도가 한기 서있는데 대웅보전 앞마당보다 서해가 훨씬 가깝게 다가온다. 그만큼 부도가 자리잡은 위치가 높아 봄햇살이 따사로웠다. 부도를 에두른 보호철책을 소나무들이 빙둘러가며 한겹 에워쌓다. 차라리 철책이 없으면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더할텐데. 부도의 구성은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에 4각의 단순한 변형을 가했고, 기단부는 상, 하대로 조성되었다. 방형의 지대석과 기단 위에 원형의 탑신과 6각의 옥개석 위에 상륜은 2단의 원화와 보화를 조각했다..

함허대사가 정수사(淨水寺)로 개명하다

정수사로 향하는 고개 못미쳐 천연기념물 제79호인 화도면 사기리 탱자나무가 길옆에서 탐스런 열매를 가지가 찢어져라 매달았다. 갑곶리의 탱자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북방한계선을 입증한다. 탱자나무는 운향과에 속하는 관목상으로 자라는 교목으로 줄기가 푸르나 낙엽성이다. 탱자나무는 봄이면 물레꽂같이 아름다운 흰꽂을 피어내고, 가을이면 손아귀에 넣고싶은 향그런 노란 열매를 맺으며 겨울에는 뾰족한 가시만 남는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한자로 지귤이라 하는데 여기서 지(枳)는 ‘해할 지’이니 왕성한 가시가 해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그 역사가 장구한데 민중들은 도둑을 막는 방비책보다는 귀신을 쫏는 주술적인 의미에서 사용했다. 또한 전염병이 창궐하면 탱자나무 줄기를 잘라 문위에 걸어두는 벽사신앙이 지금도..

양천 원님 죽은 말 지키 듯 한다

사적 제370호 능내리의 가릉(嘉陵)은 찾아가는 길이 쉽지않다. 하일리 면소재지를 지나 조산리와 가릉포로 빠지는 갈래길 못미쳐 고개길 내리받이에 안내판이 서있다. 왼편 능내리 마을회관을 오른쪽에 끼고 들어서면 마을로 들어가는 고샅이 나타난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산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끝머리 외딴집이 나타나고 산길이 이어진다. 잡목이 우거진 고랑패인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고려 24대 원종 비인 순경태후의 능인 가릉이 진강산을 배경으로 양지바른 터에 자리잡았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 충렬왕의 어머니다. 고려 고종 31년(1244) 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종 3년(1262)에 정순왕후에 추봉되고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태후에 추존되었다. 고려후기 왕실 묘제를 따랐..

하일리의 저녁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다

나는 토산품판매센터에서 신터미널을 끼고 찬우물고개를 넘어 2번도로를 탔다. 인산저수지 갈래길에서 양도면소재지 하일리로 향하는 301번 도로에 들어섰다. 답사여정에서 나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양도와 화도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양도면 중앙에 해발 443m 진강산이 자리잡았고, 그 여맥이 사방으로 뻗어 낮은 구릉을 이루었다. 남쪽에 비교적 넓은 들녘이 자리잡았다. 양도의 진산 진강산이 자리잡은 형세가 강화도의 뭇산과 달라 이런 전설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따뜻한 남쪽을 향해 맏형 마리를 필두로 혈구, 고려, 진강, 능주 다섯형제가 길을 나섰다. 한반도에 이르렀을 때 먼저 자리잡은 삼형제 즉 삼각산(三角山)이 있어 형제는 육지가 코앞에 보이는 서해에 자리잡기로 했다. 먼저 맏형인 마리(摩利)가 뭍을 향해..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 무명용사의 합장묘다

1871년 신미양요. 어재연, 어재순 장군 형제와 휘하 200여명의 군사는 48시간의 사투끝에 전멸했다. 형제장군의 순국의 뜻을 기려 쌍충비와 비각을 세웠다. 그리고 순국무명용사비와 신원을 알 수 없는 51명의 전사자를 7기의 분묘에 합장한 신미순의총비가 용두돈대 가는 길에 있었다. 특히 이들은 적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결사항전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의로 싸워 모두 순국해 이곳을 찾는 이들의 옷깃을 저미게 만들었다. 나는 쌍충비각과 신미순의총비를 찾아 잔솔로 덮힌 산길을 올랐다. 오솔길 양안의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땅위로 뿌리를 드러냈다. 지난 여름 폭우의 흔적이다. 아마 이 나무들이 없었다면. 신미순의총은 낮은 담장으로 묘역을 둘렀다. 상석과 한쌍의 망주석 그리고 비가 묘앞에 서있다. 배롱나무 ..

초지진 노송은 이 땅 아픈 근대사의 증언자다

강화도 남동해안은 한강의 막대한 영양염류의 운반, 큰 조석간만의 차, 광활한 갯벌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해안생턔계로서 ‘게들의 천국’이다.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는 농게와 칠게 그리고 세스랑게의 서식지다. 또한 1cm 남짓한 염낭게가 해변에 떼지어 산다. 이처럼 게, 새우, 물고기 등 먹이감이 풍부하여 천연기념물 제205호인 저어새를 비롯한 쇠청다리 도요사촌, 노랑부리 백로 등 희귀종의 철새 도래지이기도 하다. 갯벌은 66%의 수산생물이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귀중한 생태계의 보고다. 우리나라는 ‘97년 3월 습지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인 람사협약에 가입했다. 갯벌은 조차가 크고 지형이 완만하며 개흙이 공급되는 특수한 지역에서 형성된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경관이 뛰어나다. 사고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