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유적 제9호 함허대사 부도는 정수사 진입로 돌계단을 올라와 요사채 뒷편 잡초 우거진 공터를 지나야 한다.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줄기를 하늘로 향해 치뻗친 잡목숲 사이로 난 산길로 들어서는데 누렁이 한마리가 낮선이를 만나 극악스럽게 짖었다. 조금 오르면 낮은 야산자락에 부도가 한기 서있는데 대웅보전 앞마당보다 서해가 훨씬 가깝게 다가온다. 그만큼 부도가 자리잡은 위치가 높아 봄햇살이 따사로웠다. 부도를 에두른 보호철책을 소나무들이 빙둘러가며 한겹 에워쌓다. 차라리 철책이 없으면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더할텐데. 부도의 구성은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에 4각의 단순한 변형을 가했고, 기단부는 상, 하대로 조성되었다. 방형의 지대석과 기단 위에 원형의 탑신과 6각의 옥개석 위에 상륜은 2단의 원화와 보화를 조각했다. 부도 주위에 보호석으로 장대석을 둘렀고, 부재는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164cm이다.
함허(1376 ~ 1433) 기화는 21세때 관악산 의상암에서 출가했다. 이듬해 양주 회암사에서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운수납자로 명산을 편력하다 28세때 회암사로 돌아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천마산 관음굴에서 후학을 키웠고, 조선의 억불숭유정책에 대항하여 유․불․도의 삼교일체사상을 제창했다. 함허 기와는 고승답게 신이한 전설이 전하는데 상주 사불산에 머물면서 두권의 ‘금강경설의’를 지었다. 어느날 제자를 불러 “하나는 태우고, 하나는 땅속에 묻으라”고 일렀다. 얼마후 ‘금강경설의’를 파묻은 자리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뻗쳤다. 함허는 세종15년(1433)에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입적했다. 비는 봉암사에 세워졌고, 사리는 다섯군데서 나누어 부도를 모셨으니 가평 현등사, 희양산 봉암사, 황해도 현봉사, 위치가 불분명한 인봉사 그리고 강화 정수사이다.
정수사를 둘러싼 숲은 꽃과 잎이 피는 시기가 달라 이별초라고 불리는 상사화 자생지역으로 이곳의 꽃은 분홍색이 아닌 노란꽃으로 학술적 연구가치가 높아 특별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나는 정수사를 나와 비포장도로를 타고 동막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어느덧 가을이지만 바닷가 언덕 솔숲에 나들이나온 가족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았다. 모래밭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싱그러운 소란이 오후의 햇살을 튕겨냈다. 여기 동막리에서 강화도의 선사시대 문화유적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마니산을 등지고 강화도 남쪽해안에 펼쳐진 드넓은 갯벌은 국내 최대의 도요새 집결지로 유명하다. 지구를 반바퀴도는 장거리 여행의 명수 도요새의 중간 기착지가 바로 이곳이다. 또한 쇠청다리 도요사촌 등 세계적 멸종위기종 4종을 포함한 38종 2만마리와 1만마리 이상의 기러기를 비롯한 겨울 철새가 이곳에 몰려든다. 강화도 갯벌의 생태계 먹이사슬이 든든하게 구축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생태계의 보물’들이 집결하는 강화도 남안 갯벌은 초지진을 찾아가면서 둘러보았던 남동갯벌과 함께 자연생태계 보전구역으로 하루빨리 지정되어야 마땅하다.
마리산 정상 참성단을 찾기는 이미 하루가 기울었다. 오늘 답사는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사적 제226호인 덕진진(德津鎭)에서 마감하기로 했다. 나는 길상면 마그내에서 덕진진으로 향했다. 관람권 전면은 남장포대를 부감법으로 담았다. 덕진진의 성문루는 공해루(控海樓)로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부터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였다. 조선숙종 3년(1677)에 만호(萬戶)를 두고 군관 26명, 병 100명, 돈군 12명, 군선 2척을 배치했다. 덕진진도 역시 초지진, 광성보와 마찬가지로 병인,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계속)
p. s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을 이르는 말로, 정체불명의 '부도'보다 요즘은 '승탑'이라는 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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