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江都를 가다

남장포대는 강화도의 제일 포대였다

대빈창 2012. 11. 5. 06:34

 

남장포대로 향하는 숲속 오솔길을 걷는데 바다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물살이 좁은 해협을 빠져나가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마치 신미양요 때 조선군의 포격에 아우성치는 미해군의 비명처럼 들렸다.강화도는 지형을 따라 쌓은 성이 동북에서 동남까지 16km에 이르렀는데, 그중 9개의 포대중 이곳 남장포대가 강화 제일의 포대였다. 그것은 자연적인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적의 눈에 뜨이지 않은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나는 덕진돈대를 찾아 바닷가 언덕에 세워진 향토유적 제9호인 경고비(警告碑)앞에 섰다. 이 비는 외국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 고종 4년(1867)에 대원군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 비는 장대석 지대위에 기단을 만들고 높이 147cm, 폭 53cm, 두께 28cm의 대리석 비신을 세웠다. 전면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겼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당시 힘겨웠던 국제정세를 말해주 듯 비는 우측 상단과 하단에 탄흔을 입었다.

나는 화도 마리산으로 향했다. 강화인들이 가장 많이 아끼고 사랑해 연중무휴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민족의 성지 마리산과 정상에 위치한 참성단.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나의 강화도 답사는 시간적으로 6개월여, 공간적으로 강화군의 12개 읍면을 찾았다. 유일하게 나의 여정에서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곳은 강화도의 막내 서도이다. 마리산을 찾아가면서 오래 전의 기억을 반추했다. 서도의 면소재지 주문도는 내가면 외포리에서 카페리호를 이용해야 한다. 볼음도, 아차도를 거쳐 운항하는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이다. 서도는 강화도의 서남부에 주문도, 볼음도, 아차도, 말도 4개섬으로 이루어져 행정명칭은 4개도서가 서해상에 분포한데서 연유했다. 모든 도서는 낮은 구릉지와 저지대로 이루어져 주문도에서 제일 높은 산인 봉구산(烽丘山)이 146m에 불과하다.

주문도는 조선시대 명장 임경업장군이 명나라에 원병수신사로 출국했을 때 항해가 순탄치 않자 인조에게 문서를 전달한데서 아뢸주(奏)를 썼다.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 주문도(注文島)라 부른다. 서도 중앙교회는 시지정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1883년 성공회신부 왕대인, 갈대인의 선교로 서도에 복음이 시작되었다. 1905년 친일단체 일진회의 반대를 이겨내고 영생학교를 설립했다. 1923년 한옥예배당을 신축해 현재에 이르고, 1937년 영생학교가 서도초등학교로 인가되었다. 한편 아차도는 육지에서 천년, 바다에서 천년을 묵은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는 도중 임신한 여자를 보고 아차하는 순간에 바다로 떨어져 하나의 섬이 되었

다는 애기가 전해온다. 아차도의 꼬치산앞 바위를 매바위라 하는데 그 형용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볼음도는 주문도의 이름유래와 연결된다. 임경업장군이 섬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15일을 체류했는데 둥근달을 보아 만월도(滿月島)라 했다가, 후에 발음대로 볼음도(乶音島)라 불렀다. 볼음도에 천연기념물 제304호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800년전 큰물때 떠내려 온것이 현재 높이 24.5cm, 밑둘레 9.7m의 노거수로 자라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당산나무로 부락민들이 풍어제를 지냈다. 속설로 석모도 보문사 은행나무와 부부지간이라 한다.

나는 양도면 소재지 하일리를 지나 길상과 화도 방면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가릉포로 차를 몰았다. 낮으막한 고개길을 오르자 들녘 너머 마리산이 보였다. 화도 마리산과 양도 진강산 사이에 펼쳐진 가릉포 들녘. 바다에 닿은 포구가 아닌데 마을 이름은 가릉포일까. 그 의문은 강화도의 간척사업 역사를 알아야만 풀릴 수 있다. 나는 석모도와 교동도에 발길이 미치면서 두 섬의 간척사를 간략하나마 언급했다. 강화도에는 해안선 지명을 의미하는 포, 곶, 해, 도 등 현재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지대에 부지기수로 남아있다. 포로는 가릉포, 선두포, 덕포... 곶자가 들어간 지명은 철곶, 산곶, 곶창 등 이런 지명은 예전 바닷가였다는 것을 반증한다.(계속)

 

p. s  강화도답사기를 지역신문에 연재할 당시만 해도 나의 발길은 강화의 막내 서도에 우연히 한번 발길을 디뎠을 뿐이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찾는 답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7년전 주문도와 인연을 맺었고, 4년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섬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제는 섬에 뼈를 묻을 작정이다. 주문도 봉구산은 나의 산책을 맞아주는 벗이고, 천연기념물 볼음도 은행나무는 일주일에 한번 상견례한다. 이러기에 세상 일은 모른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