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70호 능내리의 가릉(嘉陵)은 찾아가는 길이 쉽지않다. 하일리 면소재지를 지나 조산리와 가릉포로 빠지는 갈래길 못미쳐 고개길 내리받이에 안내판이 서있다. 왼편 능내리 마을회관을 오른쪽에 끼고 들어서면 마을로 들어가는 고샅이 나타난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산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끝머리 외딴집이 나타나고 산길이 이어진다. 잡목이 우거진 고랑패인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고려 24대 원종 비인 순경태후의 능인 가릉이 진강산을 배경으로 양지바른 터에 자리잡았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 충렬왕의 어머니다. 고려 고종 31년(1244) 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종 3년(1262)에 정순왕후에 추봉되고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태후에 추존되었다.
고려후기 왕실 묘제를 따랐을 법한데 후에 봉분과 석물이 파괴되어 폐허였던 것을 1974년 현재 모습으로 보수, 정화되었다. 단촐하게 묘 앞에 문인석 한쌍만이 남았고, 봉분 옆 좌우에 호랑이로 보이는 석물이 머리만 내놓고 땅에 묻혔다. 가릉에서 마주보이는 진강산 정상에 감수천(甘水泉)이라는 샘이 있었다. 여기서 ‘감’은 ‘물이 달다’는 뜻보다 신성하고 으뜸이라는 옛말의 어원에서 유래했다. 강화도는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버금가는 종마 양육소였는데 명마 ‘벌대총’이 태어나면서 ‘말난우물’로 불려지게 되었다. 나는 언젠가 가을 가릉뒤 진강산록을 올랐다. 얼마을 오르자 흰억새꽃이 만발한 평지가 나타났는데 산중에서 보기 드물게 넓었다. 나는 나름대로 여기가 진강목장터가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진강목장이 배출한 조선 효종때의 명마 벌대총(伐代總)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병자호란시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 때, 돌아올 때 탄 말이 진강목장 출생이었다. 효종이 북벌을 추진할 때 진강목장의 말을 아껴 ‘벌대총’이라고 불렀다. 이렇듯 임금이 특별히 사랑하여 거동시만 부리고 평시에는 진강목장에 놓아 먹이게 했다. 그런데 한양에서 강화로 오던 벌대총이 양천에서 병사했다. 양천원님은 임금의 진노가 무서워 알리지 못하고 죽은 말만 지켜보며 가슴을 태우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한 노인의 기지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양천원님은 곧바로 대궐로 들어가 효종에게 이르기를 ‘벌대총은 누운지 사흘이요, 눈감은지 사흘이요, 먹지않은 지가 사흘입니다“라고 아룄다. 이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던 임금은 ”그렇다면 벌대총이 죽었단 말인가“하고 되물었다. 우리 속담에 난감한 일을 당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때 흔히 쓰는 ’양천원님 죽은 말 지키 듯 한다‘는 여기서 유래했다.
가릉을 벗어나 조산리 길을 타다 화도면 덕포리로 향하는 지름길인 농로로 접어 들었다. 덕포리에 족실(足失)방죽과 선두포가(船頭浦)가 붙어 있다. 수로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점차 중천으로 떠오르는 햇살에 자리를 비켜주고 있었다. 뚝방의 간이 포장마차에서 낚시꾼들의 아침 요기로 사발면을 팔았다. 생각보다 많은 태공들이 하염없이 찌를 내려다보았다. 고기반 물반으로 명성이 자자해 I낚시터로 각광받는 이 곳은 유천수로. 지나가는 촌로에게 방죽의 위치를 물으니 원래 지금의 유천수로 상류에 있었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족실방죽은 없어졌다. 조선말기 왜병이 마리산을 점령하고 노략질을 일삼아 본토에 의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때 의병대장 이능권이 부대를 이끌고 왜병을 기습하여 모두 생포했다. 포로들을 수송하다 방죽에 이르러 왜병들의 발목을 자르고 수장시켰다. 그때부터 족실방죽이라 불려졌고, 선두포는 의병대장 이능권이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을 속죄하며 정수사에 올라 부처님께 지성으로 공양했는데 이때 주지가 왜병을 죽인 곳을 명명한데서 유래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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