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사로 향하는 고개 못미쳐 천연기념물 제79호인 화도면 사기리 탱자나무가 길옆에서 탐스런 열매를 가지가 찢어져라 매달았다. 갑곶리의 탱자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북방한계선을 입증한다. 탱자나무는 운향과에 속하는 관목상으로 자라는 교목으로 줄기가 푸르나 낙엽성이다. 탱자나무는 봄이면 물레꽂같이 아름다운 흰꽂을 피어내고, 가을이면 손아귀에 넣고싶은 향그런 노란 열매를 맺으며 겨울에는 뾰족한 가시만 남는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한자로 지귤이라 하는데 여기서 지(枳)는 ‘해할 지’이니 왕성한 가시가 해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그 역사가 장구한데 민중들은 도둑을 막는 방비책보다는 귀신을 쫏는 주술적인 의미에서 사용했다. 또한 전염병이 창궐하면 탱자나무 줄기를 잘라 문위에 걸어두는 벽사신앙이 지금도 시골에서 전래되고 있다.
마리산의 장연한 암반으로 떨어져내리는 물살이 눈맛을 시원하게 하는 계곡. 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는 4자의 각자가 새겨져 있다. 위락단지를 지나 고개를 내려서면 자연석에 정수사(淨水寺)라고 새긴 안내석이 서 있다. 이 길을 따라 울창한 삼림속으로1.3km을 올라가면 천년고찰 정수사가 소박하고 아담한 모습으로 맞아준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대사가 마리산에 올랐다가 불제자가 삼매정수(三昧精修)에 들 수 있는 터를 발견하고 정수사(精修寺)를 창건했다. 이를 조선 세종8년(1426) 함허대사가 중창하면서 절터에서 맑은샘이 솟아오르자 정수사(淨水寺)라 개명했다. 가람은 터가 좁아 우리가 흔히 유명사찰에서 보는 장엄과 화려한 위용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마당에 서면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쾌한 전망이 일품이다. 대웅보전뒤는 바로 바위절벽인데 한단높은 좁은터에 삼성각이 자리 잡았다. 앞마당 오른편에 정수사라는 편액이 한귀퉁이로 밀려난 요사채가 서 있다. 마당의 삼층석탑과 2기의 석등은 근래에 만들어져 허여멀끔한 자태가 낮설다. 요사채위 바위절벽 틈새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산죽이 청신하게 느껴졌다.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정수사 대웅보전은 세종 5년(1423)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중창했다. 후에 전면의 측면 1칸에 툇마루를 증축했다. 전각은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으로 육중하다. 툇간의 공포 연꽂이 화려하고, 측면은 비바람막이 풍판을 길게 늘였다. 전각의 정면 가운데 사분합문은 화병속에 담긴 모란과 연꽃으로 소담스럽게 장식했고, 나머지 양쪽 2칸문은 소박한 격자형 창문이다. 나는 함허대사 부도를 보려고 카메라를 챙겨 다시 정수사를 찾았다. 경내로 오르려면 석축사이로 난 계단을 기역자로 꺽어드는데, 작년 석축을 뒤덮었던 담쟁이가 앙상한 줄기만 남았다. 약수터옆 평상에 앉아 메모노트를 긁적인다. 산사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고 대웅보전 처마의 풍경소리만 바람결에 일렁였다.(계속)
'강도江都를 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장포대는 강화도의 제일 포대였다 (0) | 2012.11.05 |
---|---|
사리를 나누어 다섯 절에 승탑을 모셨다 (0) | 2012.10.31 |
양천 원님 죽은 말 지키 듯 한다 (0) | 2012.10.26 |
하일리의 저녁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다 (0) | 2012.09.14 |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 무명용사의 합장묘다 (0) | 2012.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