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江都를 가다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 무명용사의 합장묘다

대빈창 2012. 9. 12. 05:42

 

 

1871년 신미양요. 어재연, 어재순 장군 형제와 휘하 200여명의 군사는 48시간의 사투끝에 전멸했다. 형제장군의 순국의 뜻을 기려 쌍충비와 비각을 세웠다. 그리고 순국무명용사비와 신원을 알 수 없는 51명의 전사자를 7기의 분묘에 합장한 신미순의총비가 용두돈대 가는 길에 있었다. 특히 이들은 적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결사항전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의로 싸워 모두 순국해 이곳을 찾는 이들의 옷깃을 저미게 만들었다. 나는 쌍충비각과 신미순의총비를 찾아 잔솔로 덮힌 산길을 올랐다. 오솔길 양안의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땅위로 뿌리를 드러냈다. 지난 여름 폭우의 흔적이다. 아마 이 나무들이 없었다면. 신미순의총은 낮은 담장으로 묘역을 둘렀다. 상석과 한쌍의 망주석 그리고 비가 묘앞에 서있다. 배롱나무 두서너 그루가 묘 한켠에서 서녁햇살을 받으며 물끄러미 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없이 순국한 용사들의 7기의 분묘에 나그네는 경배를 드렸다.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돈대다. 용두돈대는 이름과 같이 좁은 강화해협을 향해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위에 축조했다. 좁은 해협이 절묘한 지형을 이루어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였다. 용머리에 포 2기가 설치되었고, 석벽과 해협 사이 소나무가 1그루 서있다. 염하를 빠르게 빠져나가는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손돌목돈대는 너비 7.78m, 성곽길이는 108m로 고지대에 위치해 강화 일대가 훤히 조망되었다. 원형으로 둘러친 석축주위를 소나무숲이 한겹 에워쌌다. 진·보는 주로 해안지역에 설치한 외적침입 방어용 군사주둔지역으로 진(鎭)과 보(保)에 포대가 소속되었다. 돈대는 오늘날 하나의 초소였다.

나는 신미순의총비에서 광성보로 향하는 소나무 오솔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광성보는 소나무가 울창해 무더운 날씨에도 시원한 기운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남자왈 “헉!헉! 아이구 숨차, 무엇을 보겠다고 이 고생을”

“야! 호수다” 여자가 성벽너머 염하의 물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의 문화유산 인식에 대한 천박함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서구식 근대화를 뒤 쫒느라 허겁지겁 달려온 우리들. 거기에 따른 맹목적인 서구지향성. 선조들의 손때 묻은 문화유산이나 외세의 침략 앞에 결사항전한 이곳의 근대 국방유적을 찾아온 아이들, 진입로에서 보았던 하나같이 노란 옷을 입었던 유치원생들이 자라면 트인 안목을 지녔을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도서를 포함한 13개 읍면에 널려있는 문화유적과 기념물, 자연경관을 모두 돌아본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글을 이어가면서도 짬이 날때마다 미진했던 장소를 다시 찾았고, 사진을 찍었다. 강화 5일장은 신터미널 주변의 풍물시장에 2일과 7일에 선다. 예전 장날이면 강화의 특산물인 화문석과 인삼을 구할 수 있었다. 지금은 각종 약재와 수산물, 농산물이 계절에 맞추어 쏟아져 나왔다. 화문석과 인삼은 상설매장인 강화토산품판매센터나 강화대교 초입 염하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신축된 고려인삼센터에서 구할 수 있다.

고려 중엽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강화화문석은 지역 특유의 순백색 왕골을 재료로 만든 꽃무늬 돗자리가 유명하다. 강화는 기후조건이 따스하면서 습해 왕골이 길고 희어서 품질좋은 화문석의 원천이 되었다. 고드렛돌을 10만번 이상 넘겨야 만들어지는 한장의 화문석 공력은 고려때 수출품목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진상되었다. 원래 화문석 제조의 본고장은 교동이었는데 지금은 선원, 송해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화문석과 더불어 강화의 특산물로 6년근 고려인삼이 있다. 고려 고종때 재배가 시작되어, 한국전쟁후 개성의 인삼 재배자들이 강화에서 경작하기 시작하면서 개성의 고려인삼 명성이 이전되었다. 인삼은 한번 심으면 6년의 경작기간과 땅힘이 쇠해 10년은 땅의 휴식을 필요로 한다. 인삼은 기후, 토양등 환경조건이 까다로운데 6년근 인삼의 최적지는 강화도다. 신비의 영약으로 꼽히는 인삼은 건조상태, 크기, 무게가 평가 기준이지만 무엇보다  생김새가 사람과 가까워야 일등품으로 인정받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