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토산품판매센터에서 신터미널을 끼고 찬우물고개를 넘어 2번도로를 탔다. 인산저수지 갈래길에서 양도면소재지 하일리로 향하는 301번 도로에 들어섰다. 답사여정에서 나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양도와 화도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양도면 중앙에 해발 443m 진강산이 자리잡았고, 그 여맥이 사방으로 뻗어 낮은 구릉을 이루었다. 남쪽에 비교적 넓은 들녘이 자리잡았다.
양도의 진산 진강산이 자리잡은 형세가 강화도의 뭇산과 달라 이런 전설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따뜻한 남쪽을 향해 맏형 마리를 필두로 혈구, 고려, 진강, 능주 다섯형제가 길을 나섰다. 한반도에 이르렀을 때 먼저 자리잡은 삼형제 즉 삼각산(三角山)이 있어 형제는 육지가 코앞에 보이는 서해에 자리잡기로 했다. 먼저 맏형인 마리(摩利)가 뭍을 향해 앉자 그를 따라 혈구와 고려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세째인 진강이 자리를 잡으면 막내인 능주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에 진강은 돌아가려고 몸을 틀었는데 그때 마리형이 뒷덜미를 나꿔채는 바람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기에 강화도의 산중 진강산만이 뭍을 향하지 않고 돌아앉았다.
강화도는 고려 무신정권시 몽고의 침략으로 39년간 국가의 수도였다. 왕족의 무덤이 많을 것 같으나 현재 전해지는 능묘는 4기에 불과하다. 사적 제224호 고려 고종의 능인 홍릉은 강화읍 국화리에 있고, 나머지 3기가 양도면에 자리 잡았다. 길정리에 사적 제369호인 고려 희종의 능인 석릉(碩陵)과 사적 제371호인 고려 강종의 비 원덕태후의 능인 곤릉(坤陵)이다. 하지만 나의 발걸음은 이 두 능묘에 미치지 못했다.
양도면 소재지 하일리로 향하면 진강산 서록을 넘는 하우고개를 만난다. 고개 정상 못미쳐 오른쪽 공터에 근래에 제막된 ‘정제두선생숭모비’가 서있고,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에 ‘강화학파의 태두’ 하곡 정제두의 묘가 자리잡았다. 예전에는 묘앞 공터를 가로수가 막아 답사객은 묘를 지나 마을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도보로 고개를 거슬러 올라야 했다. 다행히 근래 가로수를 베어내 서너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묘앞에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비가 마련됐다. 2m 크기의 홀을 든 문인석이 좌우에서 시립했고, 망주석 2기가 서있다. 묘뒤는 잔솔과 떡깔나무, 밤나무가 에둘렀는데 송이가 벌어져 밤알들이 나뒹굴었다.
정제두(1649 ~ 1736)는 조선 현종9년(1668)에 문과 초시에 급제하여 영조때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요직에 임명되었다. 정제두는 20세부터 박세채를 스승으로 양명학에 심취했다. 당시 조선은 유교적 정통주의에 입각해 주자학을 따라 양명학을 이단시했다. 하지만 영조의 보호아래 그는 초지일관 양명학파를 확립했다.
양명학은 유교의 한 계파로 명나라 왕양명에 의해 주창되었는데, 지식인의 실천을 강조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정제두는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을 “오늘날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자를 핑계대는 것이요, 나아가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학문적 진실성을 비판했다. 양명학을 천명한 정제두는 강화에서 학문의 일가를 이루어 ‘강화학파’라 하는데, 200여년간 지속되었다. 그 계보는 원교 이광사, 연려실 이긍익, 석천 신작, 영재 이건창, 정인보 등 거목들에게 이어졌다.
조선후기 실학파인 북학파와 이용후생학파에 사상적 영향을 끼친 강화학파의 학문적 진보성에 대해 신영복교수는 ‘나무야 나무야’에서 하일리의 일몰에서 내일의 일출을 바라보며 이렇게 애기했다. -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에서는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저 해가 내일 아침 다시 동해로 솟아오르리라는 예언을 듣기 때문입니다.(...)이곳 하일리에서는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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