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江都를 가다 29

벼락이 쳐 바위를 깨 샘물이 솟구쳤다

김상용순절비에서 오른 골목을 타고 조금만 오르면 지방유형문화재 제111호인 ‘성공회 강화성당’이 나타난다. 강화성당은 한옥에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수용한 특이한 건물로 얼핏보면 영락없는 가람의 한 건물이다. 정문은 여느 사당처럼 태극무늬가 그려졌고, 솟을삼문도 한옥의 빗장문이다. 정면 4칸, 측면 10칸의 이 건물은 광무 4년(1900)에 초대 코프주교에 의해 대한성공회로서는 강화에 제일먼저 건립했다. 이층은 팔작지붕으로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달았고 기둥마다 주련을 붙였다. 마당에는 거대한 보리수 2그루가 울창한 그늘을 드리워 사찰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하지만 내부는 로마네스크나 고딕성당 건축에 영향을 미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 외래종교의 토착화 과정을 건축 양식으로 보여주는..

쏟아지는 햇살에 탱자가 황금처럼 빛났다

강화역사관은 역사의 고장답게 후손에게 역사를 계승하고, 호국정신 함양을 위해 1988년 개관했는데 4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졌다. 제1전시실은 돌도끼, 돌칼, 유문토기등 석기시대 유물이, 제2전시실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강화출토 문화유물이, 제3전시실은 몽고침입과 병자호란에 이르는 북방민족침략사 전시유품이, 제4전시실은 근대 서방열강의 침략과 3.1운동사가 펼쳐져 있다. 역사관을 나와 갑곶진을 오르는 계단을 향하면 천연기념물 제78호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가 나타난다. 이 탱자나무는 화도면 사기리의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9호)와 우리나라 탱자나무 생육 북방한계선을 이룬다. 수령은 400년으로 밑둘레 1m, 높이는 4m이지만 사방으로 울창한 가지를 뻗어 탱자나무도 이렇게 크게 자랄수 있구나하는..

강화도는 오직 승천포 한 곳에 배를 댈 수 있다.

유선생과 나는 제 시간에 차를 대기위해 급히 월선포구로 향했다. 교동 면소재지 대룡리를 벗어나는데 할머니 한분이 손자를 안은채 손을 흔든다. 포구가 다가오자 할머니는 극구 고맙다며 천원을 건네준다. 계면쩍은 우리는 손자 과자값을 어떻게 받는냐며 아기손에 집어 주고서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교동이 나은 인물로 고려말 대몽항쟁기의 삼별초를 이끌었던 김통정이 유명하다. 최정예 특전부대인 삼별초는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왕족인 온을 임금으로 추대해 끝까지 항전한다. 1270년 삼별초는 원군에게 내부가 노출된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에 새 거점을 마련한다. 하지만 1271년 여몽 연합군의 기습에 휘말려 패주의 길을 나서는데 장수 배장손이 이끄는 부대는 진도 남도석성에서 무릎을 꿇고, 김통정은 제주도 항파두리성에 근거..

광개토태왕이 함락한 백제의 관미성은 교동도다

국화저수지를 끼고 읍내로 들어서자 강화산성의 4대문중 사적 제132호인 서문인 첨화루(瞻華樓)가 시야에 들어왔다. 숙종 37년(1711)에 강화유수 민진원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현판 글씨도 그가 썼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누상에 오르면 읍내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서문은 주변이 잘 정돈되어 다른 곳보다 한가롭게 보였다. 1977년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는데 옛돌과 섞여있는 기계로 다듬은 흰빛깔의 화강석의 이물스런 느낌을 담쟁이가 가려주고 있었다. 돌도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써야 눈맛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길건너는 소나무가 빙둘러 서있는 가운데 ‘연무당 옛터’라고 음각된 흰 대리석이 서있다. 원래는 강화부 군사의 훈련장이었는데 일제강점 36년의 치욕의 시발점 강화도조약 - 고종 ..

고려산 정상 오련지(五蓮池)에 오색(五色) 연꽃이 만개하다

내가고인돌에서 고려저수지를 지나 적석사로 향하는 길 양안에 포도원이 한뼘 건너 나타났다. 간이천막을 두른 노점 가판대가 지나치는 길손을 유혹한다. 강화포도는 송이알이 단단하고 맛이 달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상품으로 내놓은 포도송이를 손질하는 농부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IMF 한파로 역사의 고장 강화도를 찾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줄었고, 며칠전 낙뢰를 동반한 밤중 폭우로 열과현상이 일어나 그만큼 잔손질이 필요했다. 적석사는 고려산의 줄기인 낙조봉 기슭에 터를 잡았다. 낙조봉 정상에서 일몰을 바라보는 ‘적석낙조’는 강화팔경중 하나다. 오련사중 홍련사가 이름이 바뀌어 지금의 적석사라고 한다. 지난여름 폭우로 절로 향하는 산길은 고랑이 심하게 패였고, 날카로운 잡석들이 널려 있었다. 절 입구는 일주문도 없..

옛날 큰물이 지면서 상주산이 떠내려 왔다

석모도 3대 명산중의 하나인 상주산은 바위산이다. 나는 차를 몰고 상주산에 다가갈때마다 어떤 연관인지 진경산수화의 개척자이면서 대가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떠올렸다. 비가 개인후 물안개가 점차 거쳐가는 인왕산의 전경을 그린 그림과 상주산. 그것은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억센 근육질을 자랑하는 골산에서 연상되었을 것이다. 촌로들은 이런 전설을 애기한다.‘옛날 상주산은 교동에 있었는데 어느해 큰물이 지면서 이곳으로 떠내려왔다. 교동사람들이 자기들의 땅이라고 세를 요구했다. 그러자 삼산사람들이 우리에게 필요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말했다. 울산에서 올라왔다는 설악산의 울산바위. 영월에서 물에 떠내려왔다는 단양의 도담상봉과 일맥상통하는 판에 박힌 이주설로 황당한가. 아니다. 석모도의 간척사업 역..

눈썹바위 부처님은 비둘기의 둥지며 뒷간이다

마애석불좌상을 향해 오르는 계단 초입에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웠고, 드문드문 산죽이 청신한 기운을 뿜어냈다. 첫번 계단 쉴참 한구석에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세워졌다. 이수에 새겨진 여의주를 문 용의 뒤엄킴은 그런대로 우리 전통의 미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귀부는 흡사 서양의 날도마뱀 날개같은 것을 입가에 달고있어 이물스럽다. 어찌보면 거북이가 아닌 중생대의 공룡처럼 보였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5호인 마애석불좌상은 가슴에 큼직한 卍자를 새겼는데 전체적인 조형미는 조화롭지 못하다. 거대한 눈썹바위가 그늘을 드리운 암벽에 높이가 32척인 마애불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 주지 이화응스님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 스님이 조성했다. 낙가산 중턱 바위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일몰은 절경이다. ..

보문사 나한석굴 나한상이 팥죽을 먹다

밤새 부슬비가 줄금거리더니 바람결에 가을냄새가 묻어났다. 한낮은 물기없는 햇살이 피부를 찌르지만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완연하다. 답사첫날 읍내에서 필름을 구입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석모도로 향했다. 돌캐의 할아버지 묘소부터 참배하고 답사를 시작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강화읍에서 301번 도로를 타고 20여분쯤 달리면 외포리 선착장에 닿는다. 나는 농협 연쇄점에서 소주와 종이컵, 북어포를 구입하고 차량대기소로 들어섰다. 평일에는 30분 간격으로, 주말과 휴일은 보문사를 찾는 외래인들을 실어 나르기위해 삼보해운 카페리호는 수시로 운행된다. 10여분쯤 물살을 가르면 금방 삼산면 석포리 선착장에 닿아 어이가 없기도하다. 그것은 배에 차를 싣고 내리느라 근 30여분이 소요되는데서 오는 허탈감 때문이다. ..

프롤로그 : 강도(江都)를 가다

나는 매년 한 여름에 배낭을 메고 일주일동안 답사 여정에 올랐다. 그동안 나의 발길은 지리산자락주변, 전남, 전북, 충남지역을 떠 돌았다. 나는 어줍잖게도 족적을 반추하며 남도 1996년 여름, 뜬돌과 낮꿈, 천왕봉이 지켜보는 여정, 나그네는 파랑새를 보았는가라는 글을 한 기관지에 연재했다. 나의 답사 여정은 불편하지만 목적지까지 장거리는 열차를, 지역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그 이유는 고미술에 대한 지식부족으로 문화유산에 대한 전문적 안목보다는 어설픈 감상과 그땅 사람들의 삶의 편린을 단편적으로 서술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손때가 묻은 문화유산에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학고재신서1으로 출간된 故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잡고부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