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석불좌상을 향해 오르는 계단 초입에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웠고, 드문드문 산죽이 청신한 기운을 뿜어냈다. 첫번 계단 쉴참 한구석에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세워졌다. 이수에 새겨진 여의주를 문 용의 뒤엄킴은 그런대로 우리 전통의 미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귀부는 흡사 서양의 날도마뱀 날개같은 것을 입가에 달고있어 이물스럽다. 어찌보면 거북이가 아닌 중생대의 공룡처럼 보였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5호인 마애석불좌상은 가슴에 큼직한 卍자를 새겼는데 전체적인 조형미는 조화롭지 못하다. 거대한 눈썹바위가 그늘을 드리운 암벽에 높이가 32척인 마애불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 주지 이화응스님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 스님이 조성했다.
낙가산 중턱 바위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일몰은 절경이다. 올망졸망한 섬들이 앞다투어 부처님께 경배를 드리듯이 발앞에 다가선다. 그앞 공간에 석등 2기가 놓여있었고, 휴대용 돗자리를 깔고 신도들이 연신 기도를 드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씻어주었다. 마애불 두광과 눈썹바위의 틈새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연신 구구거렸다. 내게는 그 소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처럼 들렸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온몸에 비둘기의 흰똥이 쌓여갔다. 나는 보문사 경내를 벗어나기 위해 일주문으로 향했다. 3대 관음도량답게 절을 찾는 중생들이 끊이질 않았다. 진입로의 가파른 아스팔트 고갯길을 오르는 노인네들의 발걸음이 힘겹다. 오히려 부드러운 흙길이었으면... 일주문 턱밑의 기념품가게 마당에 내놓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부모은중경’이 구슬프다.
보문사입구 일주도로에서 바다를 보면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송전탑이 연이어졌다. 그앞 바닷가에 썰물때 갯벌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해암약수가 있었다. 피부병, 위장병에 특히 효험이 있었다는 약수는 이제 ‘해암물’이라는 이름을 달고 식수로 판매되고 있다. 예전 약수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바다에 떠있는 형제처럼 오손도손한 섬들을 바라보던 정취는 사라졌고, 갯벌과 논을 가른 돌축대위 인공 구조물이 낮설다.
나는 섬의 정취가 살아있는 장구너머로 향했다. 행정명으로 매음(煤音)리. 마을이름은 이 지역에 염전이 많았는데, 큰가마에 바닷물을 넣고 청솔가지로 불을 지피면 검은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그 소리가 마을을 진동하여 그을음煤자에 소리音자를 적용한데서 유래했다. 또한 고려말엽에 목장이 있었는데 조선 이태조가 가졌던 8필의 명마중에 사자황(獅子黃)이 매음목장 출신이었다고한다. 장구너머로 향하는 길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다. 왜 지명이 하필이면 장구너머인지 그 길을 따라가며 전경을 바라보면 쉽게 알수있다. 길게 누운 앞산은 분명 장고(長鼓)처럼 생겼다. 이 길은 장고의 골을 따라 해안가에 닿는다.
길 우측은 들녁이고, 좌측은 소금밭이다. 필지마다 물을 푸는 경운기가 한대씩 서있다. 하나같이 염기가 배어있는 바람에 노출되어 녹이 쓸었다. 소금창고의 스레트지붕은 세월의 무게가 덧씌워져 묵은때로 꺼멓다. 바람벽은 보온덮개로 가렸는데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바닥은 잔 타일이 박혀있다. 가을 햇살에 액체에서 고체로 변한 하얀 결정을 염부들이 고무레로 쓸어 한켠에 모았다. 조락의 쓸쓸함을 맛볼려면 이곳을
찾을 일이다. 그 쓸쓸함이 이곳에서는 부서지는 햇살속에도 머물렀다. 염전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왼편길은 어류정 포구로 향하고, 곧장 고개길을 넘으면 장구너머 포구로 이어진다. 고개 정상에 이르면 눈아래 민머루 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황해도 파랗다. 이 곳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리다. 고개를 넘어서자 갯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몇 채의 횟집들이 바다를 향해 몰려있고, 해안에 작은 고깃배 몇척이 한가로이 떠있다. 한가롭고 적요한 풍광을 찾아온 도시인 몇 명이 선착장 끝머리에서 망둥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바닥에 펼쳐놓은 어망에 늙은 어부 2명의 잔손질이 쉼 없다. 외롭고 쓸쓸하거나 세상에 지쳐갈 때 혼자 이곳을 찾아와 자신을 되돌아 볼 일이다. 장구너머 포구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마음의 묵은 때를 씻어주는 한바탕 신명나는 장구소리이다.
보문사를 지나쳐 고개길을 오르는데 정상 못미쳐 우측의 조악한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단군우정당. 한겨울이라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조용히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시멘트로 포장된 산속 오솔길을 오르면서 나는 단군영정을 모신 퇴락한 사당을 머리속에 그렸다. 웬걸, 뜻밖에도 몇 기의 석물들이 돌축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단군석상을 모신 곳이라고 주인이 설명한다. 50여명의 섬신도들이 매달 초사흩날 제를 올리는데, 개천절 봉안식때는 몇백명이 모인다고 한다. 돌축대위에 낡은 현수막이 붙었다. - 경 국조단군 바로모셔 국란을 극복하자 축 대종교 강화단군우정당 - 양옆에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고조선 건국이념이 세로띠로 걸려있었다. 기단위의 단군좌상이 가운데 모셔졌고, 제법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 쓴 달마대사입상이 왼편에, 오른편에는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할아버지좌상, 앞쪽으로 용궁할머니상과 두마리의 용이 물을 흘려보내는 약수터가 자리를 잡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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