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부슬비가 줄금거리더니 바람결에 가을냄새가 묻어났다. 한낮은 물기없는 햇살이 피부를 찌르지만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완연하다. 답사첫날 읍내에서 필름을 구입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석모도로 향했다. 돌캐의 할아버지 묘소부터 참배하고 답사를 시작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강화읍에서 301번 도로를 타고 20여분쯤 달리면 외포리 선착장에 닿는다. 나는 농협 연쇄점에서 소주와 종이컵, 북어포를 구입하고 차량대기소로 들어섰다. 평일에는 30분 간격으로, 주말과 휴일은 보문사를 찾는 외래인들을 실어 나르기위해 삼보해운 카페리호는 수시로 운행된다.
10여분쯤 물살을 가르면 금방 삼산면 석포리 선착장에 닿아 어이가 없기도하다. 그것은 배에 차를 싣고 내리느라 근 30여분이 소요되는데서 오는 허탈감 때문이다. 하지만 배 뒷전을 따라오는 갈매기들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면, 날렵한 곡예비행으로 나뀌채는 녀석들의 먹이포획 장면에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와 그 아쉬움을 달랠수 있다. 나는 예전에 ‘강화관광과 또 하나의 볼거리’라는 글에서 녀석들의 먹이습성 변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청동빛 눈망울에서 먹이포획의 노동력 절감과 맞바꾼 건강한 야성을 잃은 슬픔을 읽는 것은 처연하다.- 하지만 IMF 관리체제에 들면서 차량도 많이 줄었다. 그만큼 갈매기들의 새우깡 쟁탈도 더욱 고달파졌을 것이다. 삼산(三山)면은 강화 6대산의 하나인 해명산, 상봉산, 상주산이 연산(連山)된 지형에서 제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돌캐 뒷산의 공동묘지로 가는길은 지난 여름 폭우로 막혀 있었다. 나는 소주와 북어포를 차에 실은채 다시 포구로 나와 면소재지 석모리를 향한 길로 접어 들었다.
고개길을 오르면 앞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암산인 상주산이 정면으로 다가오고 오른편 좁은 해협건너에 강화유스호스텔이 기슭에 자리잡은 본도(本島)의 국수산이 보인다. 길가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가든과 민박집을 지나쳐 석모리에 도착하면 상주산까지 드넓은 들녁으로 시야가 트인다. 여기서 좌회전해 항포길을 따라가다 이정표가 알리는 대로 다시 좌회전하여 고개를 넘으면 자연부락 ‘절아래’에 닿는다. 절 입구에는 음식집들이 몰려있고, 왼편으로 제법 넓은 주차장이 자리잡고 있다. 그 끝머리에 용틀임한 줄기위로 가지를 넓게 벌린 흡사 양송이같은 소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하지만 소나무 밑둥은 원형 콘크리트담이 에둘러 족쇄에 묶여있는 것처럼 애처롭다.
보문사 입장표는 전면에 마애관음보살상을 담았다. 일주문을 올려다보니 현판은「落袈山普門寺」다. 여기서 낙가는 ‘관음보살이 머무는 남해의 섬’이고, 보문은 ‘서원을 실천할 몸과 장소’를 뜻한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아스팔트로 포장된 가파른 길이다. 우측으로 실개천같은 계곡은 물이 말랐고, 머리에 기와를 얹은 새로 신축한 돌담장위로 대웅전 지붕이 빼꼼히 보였다. 언덕길을 다 오르자 공중전화부스앞에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대입(수능)시험 기도입제” 그렇다. 보문사는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소문난 3대 관음도량인 것이다. 절은 신라 선덕여왕(635)때 금강산에서 내려온 회정대사가 창건했는데 나이먹은 가람답게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엣날 한 어부가 고기그물을 드리웠는데 22개의 괴석이 올라와 바다에 버렸다. 그날밤 꿈에 노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 괴석은 천축국에서 온 불상으로 잘 받들어 공경하면 복을 받는다’고 했다. 어부가 다음날 그물을 치니 22개의 나한상이 올라왔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7호인 나한석굴에 모셔져 있는데, 지금은 21분만이 안치되어 있다. 이 나한의 영검함을 나타내듯 2개의 전설이 전해온다.
하나, 어느 추운겨울 동짓날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드려려했으나 아궁이의 불은 죽고 성냥마저 없었다. 폭설로 길이 막혀 절의 스님들은 발만 굴렀다. 한편 그때 사하촌에 어린승이 맨발로 성냥을 빌리러 왔다. 주인은 어린승이 안타까워 팥죽을 먹이고 성냥을 빌려주었다. 얼마후 절에서는 웬일인지 아궁이에 불이 붙어 불공을 드리고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했다. 며칠후 사하촌 주인은 주지께 추운날 어린승에게 불을 얻어오게 한 연유를 따졌다. 주지왈 ‘우리 절에는 어린승이 없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스님들이 나한석굴에 가보니 맨끝 나한상 입가에 팥죽이 묻어있었다.
둘, 어느때 보문사에 도둑이 들어 유기그릇 모두를 지고서 밤새 도망쳤다. 한 80여리를 왔겠거니 생각하고 쉬는데 발아래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도둑은 다시 도망을 쳤는데 새벽에 염불을 드리러 온 노전승에게 잡혔다.밤새 도둑은 절마당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한석굴은 입구가 3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졌고, 그앞에 지방기념물 제7호인 향나무가 바위틈에서 기묘한 몸부림을 치며 하늘을 향했다. 오른편 약수앞에는 스님과 신도들이 취사용으로 사용했던 덩치큰 화강암 맷돌이 답사객의 시선을 끈다. 이 맷돌은 지방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범종각의 동종은 근래에 만들어진 것인데, 신라종을 본따 비천상, 유수, 유곽, 하대, 상대를 부조로 새겼으나, 그 틈새는 시주자들의 이름으로 빼곡하다. 비명횡사한 그 권력자와 주위인물들의 천박한 자기 드러내기를 보는 것도 애석한데 한술더떠 후에 한글로 이름을 새겨넣은 자들이 있어 쓴웃음을 머금게 한다. 근래 신축한 대웅전은 원색 페인트내를 바람결에 흘리고 있었다. 처마의 풍경소리가 햇살을 반사시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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