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고인돌에서 고려저수지를 지나 적석사로 향하는 길 양안에 포도원이 한뼘 건너 나타났다. 간이천막을 두른 노점 가판대가 지나치는 길손을 유혹한다. 강화포도는 송이알이 단단하고 맛이 달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상품으로 내놓은 포도송이를 손질하는 농부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IMF 한파로 역사의 고장 강화도를 찾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줄었고, 며칠전 낙뢰를 동반한 밤중 폭우로 열과현상이 일어나 그만큼 잔손질이 필요했다.
적석사는 고려산의 줄기인 낙조봉 기슭에 터를 잡았다. 낙조봉 정상에서 일몰을 바라보는 ‘적석낙조’는 강화팔경중 하나다. 오련사중 홍련사가 이름이 바뀌어 지금의 적석사라고 한다. 지난여름 폭우로 절로 향하는 산길은 고랑이 심하게 패였고, 날카로운 잡석들이 널려 있었다. 절 입구는 일주문도 없이 돌탑 2기가 서 있는데 가람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넓지않은 경내는 도구와 연장들로 어수선하고 요사채를 짖는 일꾼들의 뚝딱거리는 망치소리만 적막한 산사를 휘저었다. 산사태를 당했는 지 대웅보전 지붕에 루핑을 씌웠고, 안마당에 천막을 치고 ‘동기와불사’를 접수하고 있었다. 법당의 부처님을 가운데로 보현과 문수보살이 좌우에 시립했는데 개금을 새로 했는지 조명 아래 금빛깔이 화려했다. 적막하고 한가로운 절집에 스님은 먼산바라기를 하고 중생은 나홀로였다. 거대한 괴목 2그루가 풍성한 그늘을 드리웠고, 나무 아래는 까마득한 산비탈이다. 나는 무심히 바위에 걸터앉아 먼데 시선을 두었다. 서해로 달음박질치는 산줄기 사이로 배 한척이 거슬러 올라왔다. 시야 끝간데까지 산줄기와 바다물길이 요철처럼 겹쳐 보였다.
적석사 입구의 유일한 옛 유적인 적석사사적비는 명필 백하 윤순이 썼다. 백하 윤순을 찾아 진경시대2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의 글 「진경시대 서예사의 흐름과 계보」를 펼쳤다. 동국진체의 효시 옥동 이서(1662 ~ 1723)는 한국 서예사상 최초의 서론(書論)인 필결(筆訣)을 지어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런 옥동체는 세상에서 동국진체(東國鎭體)라 불렸는데,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1668 ~ 1715)에게 전해지고 다시 공재의 이질인 백하 윤순(1680 ~ 1741)에게 전해져서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된다. 이의 사상적 토대는 명이 멸망하자 조선중화사상에 입각하여 대두된 조선제일주의다. 이에 문화현상에서 우리 고유색을 현양하니 그림에서 진경산수화, 문학에서 진경시, 글씨에서 동국진체가 그것이다.
고비고개 정상을 넘어서면 강화읍이다. 나는 국화리에 위치한 사적 제 224호인 고려고종 홍릉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 계곡마다 산위에서 굴러 떨어진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았다. 거목이 뿌리채 뽑혀 나뒹굴고, 게곡은 깊은 속살을 드러낸 채 신음을 내질렀다. 청소년야영장을 거슬러 한참을 오르니 길없는 곳에 내가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홍릉 답사를 다음 기회로 미루고 허위허위 내려오는데 산길이 눈에 익었다. 홍릉으로 오르는 길이다. 안내판은 송곳 꼿을 틈도 없이 빽빽하여 답사객의 눈을 피곤하게 한다. 릉은 한단 위에 모셔졌는데 상석 자리엔 언젠부터인지 판판한 돌이 깔려 있었다. 허리춤에 올라오는 문인석, 무인석 2쌍이 왕릉을 호휘하고 섰다. 일생을 전쟁에 시달린 왕의 무덤치고, 릉지기가 너무 보잘것 없었다.
홍릉은 고려 제23대 임금인 고종의 능이다. 재위기간은 45년 10월로 역대 고려왕중 가장 오래 왕위를 보전했으나 재위기간 내내 숱한 전쟁으로 점철된 불행의 시기였다. 국내는 최씨 무신정권의 안정기로 접어들고, 동아시아는 몽고의 흥기로 전쟁에 휘말린다. 몽고의 팽창정책에 맞서는 가운데 무신정권 내에서 권력투쟁은 이어지고 왕실은 무신들의 암투를 이용된다. 고종은 나이 22세에 실권자 최충헌의 지지로 왕에 등극했다. 몽고군의 7번에 걸친 침략에 시달리다 1259년 몽고와 화의조약을 맺은후 강화도에서 6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인도고승 천축조사는 절터를 물색하다 강화도에 이르렀다. 어느날 고려산 정상에 이르러 오색의 연꽃이 만개한 오련지(五蓮池)를 발견한다. 조사는 연꽃 다섯송이를 허공에 날려 그 떨어진 자리마다 연꽃 빛깔에 맞추어 절을 세웠다. 백련사, 황련사, 홍련사, 흑련사, 청련사. 그중 홍릉과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자리잡은 청련사로 향했다. 절은 산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이번 답사여정에서 만나는 계곡마다 망신창이 몰골을 드러냈지만 다행히 산비탈에 비껴 자리잡은 청련사는 온전했다.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은 것일까. 절의 오랜 연륜을 절입구에서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는 은행나무와 괴목이 알려 주었다. ‘큰법당’이라는 현판과 기둥마다 걸린 주련에 한글이 빼곡하다. 요사채 서너칸에 둘러쌓인 안마당은 현대식 정원으로 잔디를 입혔다. 원통암 입구에는 ‘기도중출입금지’라는 아크릴판을 매단 바리케이트가 찾는 이없는 절집을 지키고 있었다. 절집을 벗어나려 발길을 돌리는데 평상에 앉아 나를 무심히 보고있던 비구니가 서울 말씨로 말을 건넸다. “어디서 오셨어요” 세월의 풍진에 천년고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예, 절구경 왔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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