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저수지를 끼고 읍내로 들어서자 강화산성의 4대문중 사적 제132호인 서문인 첨화루(瞻華樓)가 시야에 들어왔다. 숙종 37년(1711)에 강화유수 민진원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현판 글씨도 그가 썼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누상에 오르면 읍내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서문은 주변이 잘 정돈되어 다른 곳보다 한가롭게 보였다. 1977년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는데 옛돌과 섞여있는 기계로 다듬은 흰빛깔의 화강석의 이물스런 느낌을 담쟁이가 가려주고 있었다. 돌도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써야 눈맛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길건너는 소나무가 빙둘러 서있는 가운데 ‘연무당 옛터’라고 음각된 흰 대리석이 서있다. 원래는 강화부 군사의 훈련장이었는데 일제강점 36년의 치욕의 시발점 강화도조약 - 고종 7년(1876)이 체결된 현장이었다.
교동도에 가려면 먼저 화개해운에 전화를 걸어야 한다. 하점면 창후리에서 떠나는 카페리호는 간조시에 3 ~ 4시간 운항을 중단하기 때문이다. 도선 시간은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답사 이틀 아침 여장을 꾸며 길을 떠나는데 뜬금없이 손전화가 울렸다. 통화끝에 오늘 교동 답사는유선생과 동행하기로 하고 송해 신당리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곧장 하점 창후리 포구로 달렸다. 지난 여름의 폭우로 기세를 잃었던 염천이 뒤늦게 임무를 자각하고 아침부터 표창같은 햇살을 퍼부었다. 교동을 들어가는 창후리 포구는 외포리와 달리 한산했다. 카페리호가 이물을 틀었는데도 몇마리의 갈매기가 뱃전을 선회하고 그대로 바다에 내려 앉았다. 새우깡을 던져주는 승선객이 없다는 것을 녀석들은 영악하게 눈치 챘다. 교동도 월선포에도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교동도가 역사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다. 「고구려본기」광개토왕 즉위년 기록에 ‘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험절하고 바닷물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왕은 군사를 일곱길로 나누어 20일동안 공격한 끝에 함락시킨 것이다.’ 여기서 관미성은 교동도로 추정된다. 난공불락의 관미성 함락으로 백제 진사왕은 내부정변으로 사망하고 아신왕이 즉위한다. 이때부터 광개토왕의 대대적인 백제정벌이 시작된다. 교동(喬桐)이라는 지명은 신라때부터 일컬어졌고, 조선 태조4년에 현으로 승격되고 다시 인조7년에 부로 격상시키며 경기수영을 지금의 읍내리로 이설했다. 교동도도 석모도와 마찬가지로 여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복잡한 해안선을 이루었는데 지속적인 간척사업으로 현재의 큰 섬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유선생과 나는 먼저 교동향교를 찾기로 했다. 안내판을 보며 얼마쯤 가자 공덕비를 비롯한 비석 31개가 군집된 거리에서 길이 갈라졌다. 무턱대고 길을 따라가니 끝머리에 뜻밖에도 화개사가 있었다. 돌축대 위 일반 절집의 요사채같은 건물이 외롭게 홀로 앉아 있었다. 내세울만한 유물은 전하지 않고, 절뒤의 문무정에서 목은 이색이 독서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온다. 오히려 절 앞 양가지를 넓게 벌린 기품있는 소나무와 안마당 축대위의 앙증맞은 원당형 부도가 눈길을 끌었다. 고작해야 무릎에도 차지않는 부도지만 복련, 앙련, 보주가 그런대로 선각으로 처리되었다. 절앞에 서면 어제 적석사 답사의 전망처럼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는 산줄기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길을 돌아나와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교동향교로 향했다. 논길을 따라 얼마쯤 들어가자 논뚝의 바랜 잡풀속에 작은 비석이 서있다. ‘守令邊將下馬碑’ - 향교 입구를 알리는 비였다. 성현을 배향한 성스러운 곳이니 말에서 내려라. 경내는 까치발을 해야 넘볼수 있는 기와얹은 돌담장으로 구역지었다. 고려 충렬왕2년(1286)에 문성공 안유가 원나라에 갔다 오는 길에 최초로 공자상을 이곳에 봉안하였고 뒤이어 경도 각읍에 문묘를 설치했다. 조선 영조17년(1741) 조호신이 화개산 북록에 있던 것을 지금의 남록으로 옮겼다. 지금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내외삼문등이 자리 잡았다. 향교의 전형적인 건물 배치로 정연하고 고졸하다. 거대한 은행나무 2그루가 대성전과 명륜당 구역을 나누었다. 향교 앞 조그만 웅덩이에 지난 여름 폭우의 흔적으로 물이 고였는데 경내의 나무그림자가 바람결에 일렁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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