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 3대 명산중의 하나인 상주산은 바위산이다. 나는 차를 몰고 상주산에 다가갈때마다 어떤 연관인지 진경산수화의 개척자이면서 대가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떠올렸다. 비가 개인후 물안개가 점차 거쳐가는 인왕산의 전경을 그린 그림과 상주산. 그것은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억센 근육질을 자랑하는 골산에서 연상되었을 것이다.
촌로들은 이런 전설을 애기한다.‘옛날 상주산은 교동에 있었는데 어느해 큰물이 지면서 이곳으로 떠내려왔다. 교동사람들이 자기들의 땅이라고 세를 요구했다. 그러자 삼산사람들이 우리에게 필요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말했다. 울산에서 올라왔다는 설악산의 울산바위. 영월에서 물에 떠내려왔다는 단양의 도담상봉과 일맥상통하는 판에 박힌 이주설로 황당한가. 아니다. 석모도의 간척사업 역사를 알면 그 애기는 사실이었다. 석모도는 본래 송가도, 석모도, 매음도, 어유정도가 간척사업으로 연륙된 섬이다. 상주산은 송가도로서 고려때까지 썰물때 갯벌로 교동도에 이어져 교동부에 속했다. 오히려 현재 상·하리벌판은 갯골이 발달하여 조운선이 통행했다. 그런데 고려말부터 송가도 남쪽해안에 갯벌이 성장하며 습지가 형성되었다. 이에 조선 숙종32년(1706) 송가도와 매음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상주언이 완공됨으로써 석모도가 되었다.
삼산에는 특별한 등산로가 있다. 등산코스는 나루뿌리에서 매음리로 넘어가는 전득이고개에서 시작된다. 해발 308m인 해명산과 연이어진 해발245m인 낙가산능선을 타는 산길로 흡사 바다위를 걷는 기분을 느낄수 있다. 석모도 주변의 오밀조밀한 섬들을 발아래 거느리는 9km의 산행은 대략 3시간정도 소요된다. 대부분의 산행이 사하촌에서 시작해 정상을 밟고는 하산하는데 반해 이 코스는 연산된 봉우리 능선을 타 색다른 맛을 느낄수 있다. 산행 중간지점의 십년바위를 꼭 통과할 일이다. 배낭을 메고 한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구멍뚫린 바위가 등산로인 능선을 가로막고 있다. 이 바위구멍을 한번 통과하면 십년을 더 산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도착지는 강화도 3대 고찰의 하나인 보문사이다.
‘갈매기가 환영하는 삼산섬’의 답사를 마치고, 강화 본도로 향하는 카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카페리호가 석모도 선착장을 떠나 본도로 선수를 돌리자 예의 갈매기들이 고물에 바짝 붙어 뒤따른다. 섬을 들어올때와 마찬가지 녀석들은 새우깡 포획경쟁에 분주하다. 나는 섬으로 들어가면서 갈매기들의 눈빛을 보며 ‘건강한 야성을 잃은 처연한 슬픔’을 읽었다. 적자생존의 촘촘한 그물에서 살아남기 위한 녀석들의 먹이습속 변이를 감상적으로만 볼수없 지 않은가.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남기 위한 갈매기들의 발버둥이 오히려 애처로워 보였다. 이윽고 카페리호가 외포리에 닺을 내리자 녀석들도 하나같이 사뿐이 바다에 내려 앉았다.
내가(內可)면이라는 명칭은 일제시대에 존재했던 외가면의 안쪽이라는 지역위치에서 명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면소재지를 지나 내가저수지로 방향을 틀었다. 1957년에 준공된 면적 99ha의 강화도에서 제일 큰 저수지로 다르게 고려저수지로도 불린다. IMF 시름을 잊으려는 강태공들이 물가 주변에 띄염띄염 앉아 하염없이 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낚는 것인가. 자기회한, 세상에 대한 분노, 현실에 대한 절망,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걱정, 모멸감과 적개심... 너른 저수지 수면위로 따가운 가을햇살이 쏟아져 잔물결이 일렁이며 금비늘을 털어냈다. 나는 직장동료와 몇번인가 밤낚시로 이곳에서 밤을 밝혔다. 고기를 낚기보다는 술잔을 기울이며 수면위로 떨어져 내리는 별무더기를 바라보는 맛이 좋았다.
내가저수지를 뒤로 하고 나는 지방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내가고인돌로 향했다. 안내판에는 지석묘로 명기됐지만 나는 우리말 고인돌을 고집한다. 오히려 초입의 메기매운탕전문집 상호가 ‘고인돌’이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으로서 부장품으로 돌칼, 돌화살촉, 무문토기 등이 출토된다. 이 고인돌은 북방식 또는 탁자식으로 굄돌 내부가 시체를 안치하는 관 구실을 한다. 강화도에는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이 80여기 산재되어 있는데 그만큼 나이를 먹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찾기 힘들다. 내가고인돌은 하점면 삼거리의 강화고인돌과 함께 원형을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 굄돌 4개중 3개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1개가 땅속으로 파묻혔는 지 머리만 내밀었다. 덮개돌은 대패로 민듯이 평평하여 동네 꼬마들의 공기놀이터로 안성맞춤이다. 지금은 철책으로 가로막혔지만 예전에는 들녘에서 일하던 농부들의 들밥상으로 제격이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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