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생과 나는 제 시간에 차를 대기위해 급히 월선포구로 향했다. 교동 면소재지 대룡리를 벗어나는데 할머니 한분이 손자를 안은채 손을 흔든다. 포구가 다가오자 할머니는 극구 고맙다며 천원을 건네준다. 계면쩍은 우리는 손자 과자값을 어떻게 받는냐며 아기손에 집어 주고서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교동이 나은 인물로 고려말 대몽항쟁기의 삼별초를 이끌었던 김통정이 유명하다. 최정예 특전부대인 삼별초는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왕족인 온을 임금으로 추대해 끝까지 항전한다. 1270년 삼별초는 원군에게 내부가 노출된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에 새 거점을 마련한다. 하지만 1271년 여몽 연합군의 기습에 휘말려 패주의 길을 나서는데 장수 배장손이 이끄는 부대는 진도 남도석성에서 무릎을 꿇고, 김통정은 제주도 항파두리성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김통정 부대는 끝내 1273년 여몽 연합군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지금도 항파두리성 북문 밖에 장수물이라는 샘물이 솟구치는데 김통정 장군이 토성에서 뛰어내렸을 때 생긴 발자국에서 솟아난 물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하점면 창후리 포구가 가까워지자 갈매기 20여마리가 선착장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고깃배가 포구에 닷을 내리자 갈매기들은 일제히 바다에 내려 앉았다. 녀석들은 어부들이 고기를 고르다 버리는 잡어를 챙겼다. 갈매기들의 무서운 환경 적응력. 외포리 갈매기는 새우깡으로, 창후리 갈매기는 잡어로.
본도로 건너온 우리는 연산군의 불우한 성장 배경과 폭정 그리고 김통정의 구국항쟁을 안주삼아 술잔을 마주 대했다. 밤새 비가 내렸는 지 아침 기온은 서늘했고, 대기는 물기로 축축했다. 몸이 무거웠다. 여독에 지나친 음주로 감기 기운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하루를 쉬웠다. 답사 사흘째, 계획된 답사여정의 1/3도 못미친 조급함에 아침일찍 길을 나섰다. 다행히 엷은 안개가 사위를 덮어 오늘 날씨가 쾌청할 것을 예고했다. 지금 내가 달리는 길은 제6로다. 백두대간 개념을 우리에게 물려준 ‘산경표’의 저자 조선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 ~ 1781)은 ‘도로고’에서 우리나라의 도로망을 여섯개로 분류했다. 제1로는 서울 → 의주, 제2로는 서울 → 경흥, 제3로는 서울 → 원주 → 대관령 → 삼척 → 평해, 제4로는 서울 → 진천 → 충주 → 문경새재 → 동래, 제5로는 서울 → 과천 → 천안 → 공주 → 정읍 → 해남 → 제주, 제6로는 서울 → 김포 → 강화이다.
조선의 실학자 청담 이중환은 ‘택리지’라는 실학파 지리학의 보고를 우리에게 남겼다. 그는 택리지의 팔도총론 경기편에서 강화의 지리적 위치를 이렇게 소개했다. 광주 서쪽에 수리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산맥이 돌줄기만이 남아 강을 넘어 다시 솟아난 산이 마리산이다. 그곳이 바로 강화부이다. 강화는 동북은 강으로, 서남은 바다로 둘러쌓여 있는데 한강 수구의 나성 역할을 한다. 남북 길이가 백여리, 동서길이는 오십여리이다. 강기슭은 모두 석벽이고, 그 아래는 진흙수렁이어서 배를 댈만한 곳이 없는데 오직 승천포 한 곳만이 만조에 배를 댄다. 동쪽의 갑곶에서 남쪽의 손돌목까지 오직 배를 댈 곳은 갑곶으로 승천포와 갑곶을 지키면 이 섬은 뛰어난 자연 요새지가 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삼남지방의 세선들이 모두 손돌목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강화도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유수관을 두었다.
강화도와 김포반도의 연륙교인 강화대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편 산비탈에 몰려있는 비석군을 만난다. 총 59기의 비가 모여 있는데 영세불망비와 선정비가 대부분이었다. 조선 인조때 삼충사적비와 조선 숙종29년(1703)에 세운 금표가 눈길을 끌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제 모습을 드러낸 아침 햇살이 비석군을 아우라처럼 비쳐 주었다. 나는 여정을 서둘렀다.
길을 건너면 구 강화대교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타났고, 더리미로 향하는 초입에 강화역사관이 자리 잡았다. 관람권 전면은 부감법으로 잡은 갑곶진 전경이다. 역사관 뜰 안으로 들어서자 잔디밭에 배 한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해선망 어선으로 조선 후기에 출현한 물고기 운반선이다. 이물과 고물이 아둔하게 뭉툭하고 배의 밑바닥이 평평하여 일명 멍텅구리배로 불렸으며 강화에서는 ‘곶배’라고 했다. 곶배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큰 좁은 해협에 고정시키고,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젓새우를 어획했다. 한국형 고유 어선으로 지금은 현대적 어구·어법에 도태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 배로 어획한 젓새우를 싣고 한강수로를 타고올라 마포나루에서 필요한 생필품과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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