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순절비에서 오른 골목을 타고 조금만 오르면 지방유형문화재 제111호인 ‘성공회 강화성당’이 나타난다. 강화성당은 한옥에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수용한 특이한 건물로 얼핏보면 영락없는 가람의 한 건물이다. 정문은 여느 사당처럼 태극무늬가 그려졌고, 솟을삼문도 한옥의 빗장문이다. 정면 4칸, 측면 10칸의 이 건물은 광무 4년(1900)에 초대 코프주교에 의해 대한성공회로서는 강화에 제일먼저 건립했다. 이층은 팔작지붕으로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달았고 기둥마다 주련을 붙였다. 마당에는 거대한 보리수 2그루가 울창한 그늘을 드리워 사찰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하지만 내부는 로마네스크나 고딕성당 건축에 영향을 미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 외래종교의 토착화 과정을 건축 양식으로 보여주는 본보기다.
강화성당을 되돌아나와 언덕 아래로 100m쯤 가면 용흥궁 표지판이 서있다. 그 골목을 타고 조금가면 왼편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로 조선 제25대 철종이 19세까지 살던 용흥궁이 있다. 원래는 초라한 민가였으나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4년 건물을 새로 지었다.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낳은 부산물이다. 철종은 영조의 고손자로 할아버지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의 모반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또한 아버지와 형 원경의 역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사사되었을 때 원범의 나이 14세였다. 철종 나이19세, 제24대 헌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뜨자 6촌안의 왕족이 한명도 없었다. 이에 순조때부터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일군 순원왕후가 농사꾼 철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렴청정으로 안동일문의 세도는 극성기를 맞는다. 철종은 안동김씨 일파의 전횡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국사를 등한히 하고 여색을 가까이 해 재위 14년만인 33세에 일찍 죽는다. 철종은 세도정치의 막강한 독단에 기를 펼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스러져 간 불우한 왕이었다.
골목을 나와 언덕길을 오르면 고려궁터가 나타난다. 나는 고려궁터를 끼고 시멘트 포장길을 올랐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고려궁터를 답사하기 위해서다. 북문을 향하는 길에 관내 중학교에서 가을 소풍을 왔는 지 좁은
길이 학생들로 가득하다. 북문은 사적 제132호로 문루의 이름은 진송(鎭松)이다. 이름답게 좌우로 산비탈을 오르는 성벽은 소나무 숲에 가려 언뜻언뜻 드러난다. 북문은 고려 고종19년(1232)에 대몽항쟁을 위해 축조한 내성에 연결되었던 문으로 개경환도때 헐린 것을 조선 숙종37년(1783)에 석축으로 개축했다. 그후 정조7년(1783)에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했다. 북문에서는 북녘 땅이 지천으로 실향민들이 망향제를 지낸다. 북문을 지나쳐 조금 산길을 내려가면 오읍(五泣)약수가 있어 답사객은 목을 축일 수 있다. 그 오읍약수에 전해오는 애기가 있다.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내성을 축조할 때 가뭄으로 장정들이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깨지면서 샘물이 솟아올랐다. 오읍(五泣)은 고향과 가족을 떠나온 망향민의 한이 사묻혀 하늘, 땅, 신(神), 임금, 백성이 울었다는 뜻에서 연유했다. 오읍약수와 지천인데도 밟지 못하는 북녁땅. 이땅의 불행한 역사를 온 몸으로 버텨 온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을 생각하면 다섯번 통곡해도 시원치 않은 일이다.
고려궁터는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궁터 정문을 오르는 계단 양옆에 배롱나무가 서있다. 어느덧 9월중순이라 비루먹은 몰골의 강아지처럼 색바랜 꽃잎 몇장만이 애처롭게 매달렸다. 배롱나무는 부처꽃과로서 중국이 원산이나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식재된 낙엽성 교목이다. 나는 남도지방을 답사할때마다 붉은 꽃잎을 무수히 달아 화려하기 그지없는 배롱나무에 넋을 잃었다. 배롱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젊은 처녀의 살결을 떠올릴만큼 매끄럽다. 옛 궁터인 축대위 잔디밭은 출입을 통제되고 있었다. 한림대학교 박물관에서 외규장각터를 발굴중이다.
고려궁터는 대몽항쟁을 장기전으로 끌기위해 물에 약한 몽고군의 전투 능력을 파악하고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 19년(1232)부터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 11년(1270)까지 39년간 고려 왕조가 머물렀던 궁궐자리이다. 하지만 지금 궁터는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건물만이 남아 역사의 부침을 말해 주었다. 지방 유형문화재 제47호인 강화유수부 동헌은 정면 8칸, 측면 3칸으로 겹처마에 단층팔작지붕이다. 현판 명위헌(明威軒)은 적석사사적비를 쓴 명필 백하 윤순의 글씨이다. 동헌앞 이방청은 지방 유형문화재 제 48호로 한식목조 단층집으로 팔작지붕이며, 육방의 하나인 이방청의 집무실로 그 시대의 지방관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편 보물 제11호인 강화동종은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약탈하려다 실패한 종으로 서문 첨화루의 현판을 쓴 강화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주조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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