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역사관은 역사의 고장답게 후손에게 역사를 계승하고, 호국정신 함양을 위해 1988년 개관했는데 4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졌다. 제1전시실은 돌도끼, 돌칼, 유문토기등 석기시대 유물이, 제2전시실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강화출토 문화유물이, 제3전시실은 몽고침입과 병자호란에 이르는 북방민족침략사 전시유품이, 제4전시실은 근대 서방열강의 침략과 3.1운동사가 펼쳐져 있다. 역사관을 나와 갑곶진을 오르는 계단을 향하면 천연기념물 제78호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가 나타난다. 이 탱자나무는 화도면 사기리의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9호)와 우리나라 탱자나무 생육 북방한계선을 이룬다. 수령은 400년으로 밑둘레 1m, 높이는 4m이지만 사방으로 울창한 가지를 뻗어 탱자나무도 이렇게 크게 자랄수 있구나하는 새삼스러운 느낌을 갖게 된다. 탱자나무는 성곽밑에 심어 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보호수로서 외침으로 점철된 우리역사의 고난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동녘 하늘에서 내려쬐는 햇살에 탱자나무의 열매가 황금처럼 빛났다. 신산스런 역사의 한이 옹글게 맺혀 가지가 휘어져라 탱자가 매달려 있었다.
사적 제306호인 갑곶돈은 1656년 인천의 제물진에 소속되었으나 숙종5년(1679)에 돈으로 축조되어 강화외성과 연결되었다. 갑곶돈대에는 포 1문에 자포를 결합해 연속사격이 가능하여 임진왜란때부터 널리 보급된 화승포인 불랑기와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로서 사정거리가 300m인 소포가 염하를 마주하고 있다. 갑곶돈대는 1866년 천주교도 박해를 명목으로 강화를 침략하여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군 600명과 전투를 치른 역사의 현장이다.
이섭정(利涉亭)은 조선 태조7년(1398)에 강화부사 이성이 북쪽언덕에 세웠는데, 그후 무너진 것을 정화사업당시 갑곶진내에 복원했다. 이섭정에 오르면 염하(鹽河)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강화도는 원래 마식령 산줄기의 김포반도에 이어진 내륙이었으나 오랜 세월 침강작용으로 여러개의 구릉으로 둘러쌓인 섬이 되었다. 그뒤 한강과 임진강의 퇴적작용으로 다시 연륙되었으나, 염하가 한강에서 분류되어 물길을 만들면서 다시 하나의 섬이 되었다.
나는 염하를 떠나면서 손돌목 전설을 떠올렸다. 음력 시월 스무날을 전후하여 찬바람이 부는데 사람들은 손돌이 추위라 한다. 옛날 몽고침입시 공민왕이 해도로 피난갈 때 뱃사공이 손돌이었다. 그런데 배가 광성에 이르자 바닷물이 소용돌이를 쳤다. 왕은 손돌이 일부러 위험한 곳으로 배를 몰았다고 의심하여 목을 베었다. 사공들은 손돌의 시체를 강변에 묻었는데 지금도 김포해안 언덕에 손돌묘라는 무덤이 전해온다. 이때 심한 바람이 불어 추위가 닥치는데 그것은 손돌의 원한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비교해 보면 이 전설은 후세에 윤색된 것이다. 고려 공민왕은 몽고군이 아닌 홍건적의 난으로 강화가 아닌 경북 안동으로 피신했다.
강화 읍내에는 고려에서 조선 그리고 근세까지 역사적 발자취가 담긴 문화유적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1914년이래 강화읍의 중심지는 관청리(官廳里)로 북산밑 동문에서 서문까지 중앙도로 북변일대를 일컫는다. 이 관청리에 ‘살챙이’ 또는 ‘살창(殺昌)리’라는 자연부락이 있다. 마을 이름은 두명의 창(昌)이 여기서 피살된데 유래한다. 하나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고려 창왕(이때 나이 10세)을 평민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귀양보내 살해한 곳, 둘은 조선 광해군때 대북파의 모략으로 서인이 된 영창대군(이때 나이 7세)이 강화로 유배되어 피살되었는데, 민심에 파동이 컸기 때문인 지 강화민요에 “살채이 묻거들랑 대답을 마오‘라는 대목이 전해온다.
나는 중앙도로를 따라가다 농협군중앙회라는 안내판을 보고 우회전하여 농협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주차장
입구 길건너 정면에 지방기념물 제35호인 ‘김상용순절비’가 비각안에 자리잡고 있다. 선원(仙源) 김상용은 명종 16년(1561)에 태어나 인조 15년(1632)에 순국한 강직한 문신으로 병자호란시 척화파 김상헌의 형이다. 정조때 강화유수로 부임한 7대손 김매순이 건립한 순절비는 원래 구 남문지 자리에 있었는데, 정화사업시 현 위치로 비각을 옮기던 중 숙종 26년(1700) 선원의 종증손인 김창집이 세운 구비가 발견되어 신·구비를 나란히 비각안에 세웠다. 선원은 병자호란시 종묘사직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청군이 이곳마저 함락하자 남문 누각에서 화약을 쌓아놓고 분신했다.
병자호란과 강화도. 당시 수비대장 김경징과 부장 이민구는 경박하고 교만했다. 고려무신정권시 흉폭한 몽고군도 감히 여기를 넘보지 못했는데 ‘청군이 염하를 날아서 건너겠느냐’고 향락에 빠져 있었다. 그때 청군장수 용골대는 김포 문수산 정상에서 갑곶을 내려다 보았는데 조선군사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민가를 헐어 뗏목을 만들어 강화를 함락시켰다. 강화도는 적의 작전지로 전락했고, 인조는 청의 침략 한달여 만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 장군앞에 임금이 무릎을 꿇는 굴욕적인 삼전도 치욕을 당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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