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물속에 쓴 이름들
지은이 : 손호철
펴낸곳 : 이매진
『물속에 쓴 이름들』의 1판1쇄는 2020년 1월에 나왔다. 나는 2021년 8월에 군립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2025년 9월에 손에 들었다. 내가 진보적 정치학자와 첫 인연을 맺은 책은 ‘한국정치연구회 사상분과’ 편저로 손호철(孫浩哲, 1952- )이 감수한 묵직한 부피의 『현대민주주의론 Ⅰ,Ⅱ』(창작과비평사, 1992) 이었다.
부제가 ‘마키아벨리에서 그람시까지, 손호철의 이탈리아 사상 기행’으로 투리, 마테라, 팔레르모, 체팔루, 타오르미나, 피렌체, 이몰라, 피사, 빈치, 친퀘테레, 제노바, 토리노, 사르데냐, 로마까지 22일에 걸친 이탈리아 기행을 담았다. 의사·화가·작가로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의 카를로 레비(1902-1975),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 국제주의자 주세페 가리발디(1807-1882), 이탈리아의 셰익스피어 『신곡』의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 지동설을 주장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된 현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전인적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아메리카 대륙 정복·침략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등장했다.
나의 책읽기는 두 정치사상가에 방점을 찍었다. 500년 넘게 권모술수의 대가, 군주론자로 오해받은 『군주론』의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와 ‘시민사회’, ‘헤게모니’의 이론가 『옥중수고』의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 책은 23장으로 구성되었다. 정치학자는 마키아벨리에 네 장을, 그람시에 아홉 장을 할애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100쪽도 되지 않는 얇은 책이었다. 가톨릭 교단은 ‘살아있는 프랑켄슈타인’으로 비판하며 ‘악마의 손가락으로 쓴 인류의 적’으로 금서목록에 등재했다. 마키아벨리는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시민 민병대를 조직한 공화주의자였다. 메디치가가 재집권하고, 암살계획문서 암살자 명단의 마키아벨리는 두 팔을 어깨 뒤로 돌린 뒤 팔목을 묶어서 매다는 잔인한 고문을 여섯 번이나 당했다.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마키아벨리는 산타드레아 지방 시골집으로 유배를 당했고, 『군주론』을 완성했다. 마키아벨리가 품은 가장 큰 화두는 이탈리아 해방과 통일국가 건설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재평가되면서 정치란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적 처방만 남발한 고전 정치학을 벗어나 현실 정치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근대 정치학의 효시로 칭송받았다.
그람시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신좌파’의 효시로 20세기 가장 뛰어난 좌파 사상가였다. 그람시가 태어나고 자란 사르데냐는 농업과 광업 등 1차산업에 의존하는, 공업이 발달한 북부에 지배되고 착취를 당해 온 낙후된 변방이었다. 질라르타의 그람시 생가는 집주인 이모와 그람시 가족(7남매) 모두 10명이 함께 살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힘겹게 토리노 대학에서 공부하던 그람시는 대학을 그만둔 뒤 이탈리아 공산당 기관지 《신질서Ordine Nuovo》에서 편집장으로 일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참가로 소련에 간 그람시는 율리아 슈흐트와 사랑에 빠졌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람시는 감옥에 갇혔다. 건강이 안 좋은 율리아가 이탈리아에 올 수 없어 처형 타냐가 옥바라지를 했다.
34살에 의원 당선된 그람시는 파시스트당 당수·총리 무솔리니와 충돌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발언이었다. 면책특권의 국회의원이었지만 긴급조치로 체포되었다. 재판부는 20년4개월5일을 선고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소도시 투리의 교도소는 『옥중수고』가 탄생한 역사적 현장이었다. 병세가 악화된 그람시는 교도소에서 퀴시사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937년 뇌출혈로 위독해졌고 그람시는 병원에서 운명했다. 타냐는 그람시의 『옥중수고』 원고를 외교행낭에 넣어 모스크바로 빼돌렸다. 무솔리니가 압수·파기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뒤 소련은 원고를 이탈리아 공산당에 돌려줬다.
그람시는 좌파 지식인들에게 흔한 먹물근성과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대중을 무한히 신뢰하고 눈높이를 맞췄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농부도 농사에 관해서는 박사보다 뛰어난 지식인이라는 지적은 탁월했다. 그람시는 로마 남쪽에 자리한 비가톨릭 공동묘지에 묻혔다. 정치학자는 그람시의 무덤앞에 서서 묵념했다. 극우 포퓰리즘의 원조 파시즘의 탄압으로 감옥에서 그람시가 세상을 떠난지 80여년이 되었다. 극우세력은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부상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포퓰리즘 체제에서 사는 사람은 2001년 1억2000만명에서 2019년 20억명으로 거의 20배 늘어났다. 21세기 현실을 보고 그람시는 뭐라고 이야기할까?
영국 낭만파 시인 존 키츠(1795-1821)는 그람시와 같은 묘역에 묻혔다. 표제는 시인의 묘비에서 따왔다. 시인의 유언에 따라 묘비에는 이름 대신 문구가 적혔다. “물속에 이름을 쓴 한 사람이 여기에 누워 있다.” 정치학자는 그람시의 무덤을 떠나면서 그가 삶의 지표로 자주 되새겼던 말을 떠올렸다. ‘지적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 신자유주의체제의 모범국가, 1대99, 승자독식,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진보적 정치학자의 자기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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