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 들녘 4

묵정논

들판 한가운데 / 몇 년 동안 묵은 논이 붐비기 시작했다 / 사람 손길이 끊기고 잡초 무성한 묵정논이 되었다고 모두들 혀를 찼는데 / 어느새 뭇 생명들의 피난처가 되어 있었다 / 온갖 농약의 융단폭격을 피해 숨어드는 / 들판의 유일한 방공호였다 / 일 년 내내 붐볐다 / 처음엔 작은 날벌레들이 잉잉거렸고 / 나중엔 너구리와 고라니가 뛰고 굴을 팠다 / 능수버들이 우거지고 / 백로와 왜가리가 둥지를 틀었다 / 으슥한 밤 은밀하게 꿈틀거리는 것들, / 교미하는 무자치 박새 물오리의 빛나는 몸과 젖은 눈을 훔쳐봤다 / 방공호에서 몸을 섞는 것들은 슬펐다 / 맹꽁이가 알을 슬고 꽃가루가 날렸다 / 장마 끝에 온갖 벌레와 곤충이 울었고 처음 보는 꽃들이 은하수처럼 무더기무더기로 흘러갔다 / 사라졌던 것들이 짝을 ..

대빈창 들녘의 바람인형

바야흐로 24절기節氣 가운데 여덟 번째 소만小滿입니다.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에 듭니다. 옛날 손모를 내던 시절은 모의 성장기간이 45-50일이 걸려 모내기를 준비했으나, 요즘의 부직포 모판은 40일 이내에 모가 자라 모내기가 시작됩니다. 1년 중 가장 바쁜 계절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챙겨 대빈창 들녘으로 나섰습니다. 어제 아침산책에서 풍경을 처음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내심 마음먹었지만 거짓말처럼 장면이 사라졌습니다. 아침 해가 마니산 위로 떠올라 석모도 해명산 위로 성큼 다가섰습니다. 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사진을 찍고 농로를 벗어나자 못자리 주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중국제인데 값이 비싸더라고. 둘째가 인터넷으로 산거야.” 논 주인은 해가 떨어지면 전..

루저 기러기 가족

만우절이 엊그제였습니다. 위의 이미지는 한주일전에 산책에 나섰다가 잡은 컷입니다. 거짓말처럼 기러기 한 가족 일곱 마리가 대빈창 다랑구지 들녘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루저loser 가족처럼 보였습니다. 도대체 녀석들은 제 갈 길을 못가고 여적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을 쓸리기 위해 지하수를 퍼 올리는 논배미에서 녀석들은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나치기를 기다리며 숨을 멈추었던 놈들은, 주머니에서 손전화를 꺼내들자 덩치 큰 놈이 먼저 날개짓을 했습니다. 위험하니 피하라!는 신호 같았습니다. 일가족이 허공에 떠올랐습니다. 기러기들은 정확히 주문도의 벼베기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늦가을 여섯 마리가 먼저 눈에 뜨이더니, 벼베기를 마친 필지마다 기러기떼가 새까맣게 앉았습니다...

임인년壬寅年 기러기

임인년壬寅年 벼농사 수확이 시작되었고 기러기가 날아왔다. 스무날 전 몇 필지의 중생종 진상을 수확한 논에 내려앉은 한 가족으로 보이는 여섯 마리가 첫 손님이었다. 열흘 전 본격적인 주문도 대빈창 들녘의 만생종 삼광・추청 벼베기가 시작되었다. 놈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새카맣게 다랑구지 들녘에 몰려들었다. 나는 기러기들이 대견했다. 녀석들은 논에 서있는 알곡에 절대 입을 대지 않았다. 콤바인이 수확하면서 논바닥에 흘린 벼알만 주워 먹었다. 이미지는 한 주일전 점심 산책으로 봉구산 자락을 벗어나 대빈창 해변으로 향하는 옛길에 올라섰을 때 인기척에 놀라 하늘로 떠오른 기러기떼였다. 올 해는 여는 해보다 많은 기러기가 날아왔다. 날이 갈수록 놈들의 수가 무섭게 불어났다. 벼를 벤 논에 내려앉은 기러기가 빈틈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