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 한가운데 / 몇 년 동안 묵은 논이 붐비기 시작했다 / 사람 손길이 끊기고 잡초 무성한 묵정논이 되었다고 모두들 혀를 찼는데 / 어느새 뭇 생명들의 피난처가 되어 있었다 / 온갖 농약의 융단폭격을 피해 숨어드는 / 들판의 유일한 방공호였다 / 일 년 내내 붐볐다 / 처음엔 작은 날벌레들이 잉잉거렸고 / 나중엔 너구리와 고라니가 뛰고 굴을 팠다 / 능수버들이 우거지고 / 백로와 왜가리가 둥지를 틀었다 / 으슥한 밤 은밀하게 꿈틀거리는 것들, / 교미하는 무자치 박새 물오리의 빛나는 몸과 젖은 눈을 훔쳐봤다 / 방공호에서 몸을 섞는 것들은 슬펐다 / 맹꽁이가 알을 슬고 꽃가루가 날렸다 / 장마 끝에 온갖 벌레와 곤충이 울었고 처음 보는 꽃들이 은하수처럼 무더기무더기로 흘러갔다 / 사라졌던 것들이 짝을 맞춰 돌아왔다 /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 사람들 손이 멈춘 곳 / 사람 발길이 끊긴 들판 한 가운데 / 묵정논 한 배미가 생명의 섬처럼 떠 있다 / 농약과 화학비료의 바다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 있다
「묵정논」 의 전문이다. 이덕규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오직 사람 아닌 것』(문학동네, 2023)에서 만났다. 이미지는 가을걷이를 마친 주문도 다랑구지 대빈창 들녘의 섬처럼 떠있는 묵정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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