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노순이의 뒤를 새끼 흰순이가 뒤따르고 있다. 흰순이가 세상 빛을 본지 넉 달이 지났다. 이제 녀석은 어엿하게 자라 혼자 개구리 사냥에 힘을 쏟았다. 열배 째 새끼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흰순이에 대한 노순이의 모성애는 유별났다. 나오지도 않는 젓을 물리면서까지 품에 껴안고 지냈다. 노순이는 중성화수술을 받아 더 이상 새끼를 낳을 수 없다. 열 살의 나이에 열 배를 낳은 노순이의 노화는 애처로울 정도였다.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 고양이 사료를 제대로 씹지도 못했다.
뒷집 형이 쓰러져 대도시 대학병원에 입원한 지 석 달이 다 되었다. 뒷집 형수는 말그대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형수는 그 넓은 고추밭에서 살다시피했다. 혼자 고추를 수확해 집으로 끌어들여 세척했다. 어머니와 아랫집 할머니가 고추꼭지를 따고 반으로 갈라 하루를 햇빛에 말려 건조기에 넣었다.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이다. 땅콩과 참깨를 수확하고, 김장채소 무와 배추를 파종했다. 쪽파 종구도 이식했다. 그랬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자식들이 주말이면 섬에 들어와 일을 도왔다.
형수는 형의 병수발도 거들었다. 닭장의 50여 마리 닭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공짜로 선심썼다. 몸이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 네 마리만 남았다. 나는 형수가 집을 비울때 마다 뒷집 남은 닭과 네 마리의 고양이를 챙겼다. 식탐이 강한 미련한 놈 재순이는 여전히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앙알거렸다. 쌀쌀맞던 노랑이는 사료를 챙기는 나에게 잘 보이려는지 내가 산책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우리집 슬라브 옥상에서 나를 기다렸다. 봉구산 옛길을 따라 고개를 올라오는 나를 멀리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녀석은 몸이 날랬다. 내가 가까워지면 노랑이는 옥상에서 펄쩍 뛰어내려 나를 앞질러 자기집으로 향했다. 어서 사료를 달라는 뜻이었다. 이빨이 시원치않은 노순이는 사료를 그릇에 부어도 먹을 채를 하지 않았다. 우리집 식사 시간에 부엌문 샛문에 나타나 먹을 것을 달라고 졸랐다. 생선뼈라도 던져 주어야 녀석은 깔짝거렸다.
흰순이는 먹성이 좋았다. 재순이와 노랑이의 사료그릇에 겁도 없이 코를 박았다. 다행스럽게 녀석들은 어린 자기 식구를 챙겼다. 흰순이는 어릴 적부터 텃밭의 땅콩이나 콩 두둑에 몸을 숨기기를 즐겼다. 해가 뜨면 무성하게 자란 텃밭에 들어가 해가 떨어져서야 나왔다. 특이한 습성을 가졌구나하고 나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어느날 흰순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녀석은 햇살이 강하면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이 부신 나머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듣지도 못했다. 흰순아! 하고 부르면 여전히 딴짓만 했다.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다. 나는 여적 흰순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섬에 흰 놈이 없는데 얘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별 일이네.”
녀석이 태어나자 어머니와 형수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흰순이는 온 몸이 흰색인데 두 귀끝과 콧잔등이 검댕이 묻은 것처럼 얼룩이 졌다. 꼬리가 고양이 특유의 검정 줄무늬가 옅었다. 녀석의 장애가 돌연변이 알비노의 영향인지, 노순이의 노산老産 영향인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흰순이는 여는 고양이보다 몸이 아주 잽쌌다. 녀석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흰순이는 청력과 시력 장애와 벙어리가 주는 불편을 잽싼 몸놀림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녀석은 절대 곁을 주지 않았다. 생존에 대한 본능일 것이다. 나는 흰순이가 안쓰럽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었다. 아무쪼록 녀석이 하늘이 부여한 생을 별 탈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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