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일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으나 스스로 숨은 쉴 수 있는 상태를 '식물인간'이라고 한다. 아침 산책을 나섰다. 작은 섬을 지독한 안개군단이 포위했다. 가시거리가 고작 10여m를 넘어설까. 느리항․살꾸지항 첫 배는 모두 결항되었다. 반환점 바위벼랑이 코앞이다. 해안에 바투 다가선 산사면은 직각에 가까웠고 아까시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담쟁이가 나무 꼭대기까지 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관목을 칡과 으름이 덮었다. 바야흐로 짙은 녹음을 덩굴식물이 평정한 것 같았다.
제방을 덮은 시멘트 포장과 아까시나무 군락 사이의 좁고 긴 띠는 오랜 시간 해안에서 날려 온 모래가 쌓였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보라색 꽃이 눈길을 끌었다. 바닷가에서 짠물을 뒤집어쓰고도 잘 자라는 순비기나무였다. 우리나라 남해․서해의 해안과 섬에 흔하디흔한 염기에 강한 염생식물이다. 사리 물때 풍랑이 일면 바닷물은 제방을 넘어 아까시나무까지 덮쳤다.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물 위로 올라오면서 내는 숨소리를 ‘숨비 소리’ 또는 ‘숨비기 소리’라고 한다. 순비기나무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환점을 돌아 나오자 다시 순비기나무를 만났다. 이상했다. 빨간색 꽃이 눈에 띄었다. 나는 바닥에 누인 꽃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꽃이 아닌 플라스틱이다. 과자봉지에 든 미끼상품일까, 낚시용 소모품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비기나무는 근력(?)이 강한 나무인지 모르겠다. 며칠이 흘러갔다. 나무는 아이가 장난감을 끼고 살듯이, 팔굽을 당겨 아령을 들어 올리듯 빨간 플라스틱을 허공에 들어올린 채 내려놓지 않았다. 근력에 있어 순비기나무를 나무계의 터미네이터(terminator, 종결자)로 대접해야겠다. 나무는 줄기의 근력(?)으로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식물인간'이라는 말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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