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입에 익은 우리 익은말
지은이 : 김준영
펴낸곳 : 학고재
80년대 초만 해도 당구장은 언제나 껄렁패들로 득시글거렸다. 담배 필터를 질겅질겅 씹으며 큐를 휘두르는 것이 무슨 대단한 짖거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긴 군홧발 정권이 무지막지한 파쇼를 펄치던 시절이니, 젊은 혈기를 풀 수 없었던 일군의 청년들의 도피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나는 사회적 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겉멋에 찌든 불쌍한 청춘가나 읊조리던 한때였다. 어느날 지방 소도시의 2층에 자리잡은 허름한 당구장에 들어서면서 낯선 느낌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내 나는 당구의 스릴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며칠 당구장을 드나들다 왠지 어색한 그 느낌의 감을 잡고야 말았다. 그것은 상호를 한자로 멋지게 휘갈겨 쓴 간판에서 풍겨 나왔다. 신사(神士). 나는 그때 무식하게도 그 한자를 일본인들의 신을 모신 사당을 뜻하는 신사(神社)로 오해했다. 어찌 열혈청년이 가만히 있겠는가. 주인 아저씨께 당장 간판을 갈라고 건방지게 떠벌였다. 그때는 어느정도 낯이 익은 사이라, 아저씨는 나의 의견을 따라 신사(紳士) - 사전적 의미로 '점잖고 예의 바르며 교양 있는 남자'로 바꾸었다. 전 주인이 잘못된 의미의 상호를 단 것인지, 아니면 당시의 주인이 가게를 인수하면서 상호를 새로 해 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좋게 끝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주인은 나의 젊은 객기가 마음에 들었거나, 나와 무식이 막상막하라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할 신사참배의 그 신사(?)로 착각하여 부리나케 갈아 치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적 나는 당구장을 출입하는 남자들의 이미지가 신사보다는 껄렁패로 인식되었는지라, 엄밀히 말하면 신사(紳士) 당구장도 말이 안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책을 며칠간 잡으면서 20년도 더된 그 일을 떠올리며 나는 실없는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이 책은 괄시당하는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깊은 한 노학자의 노력의 결실이다. 지은이 김준영 전북대 명예교수는 나이가 90이 다되었으나 국적불명의 외래어에 뒷전으로 밀려 홀대받는 우리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한다. 30여년에 걸쳐 전국을 떠돌며 발품을 판 결과로 이 책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표제처럼 이 책에 실린 358개의 익은말은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에 구전되면서 몸에 밴 말들이다. 가나다순 한글사전 식으로 실린 익은말들을 하나하나 읊조리다 보면 요절복통할 우스개와 기상천외의 비유로 우리말 어감의 풍부성에 새삼 놀란다. 표지의 그림은 신호도(神虎圖)로 19C 민화인데, 용맹스럽기보다는 해학적인 범의 자세가 새삼 천대받는 우리말의 몰골처럼 비쳐진다. 안 그런가.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사를 새삼 의미해보라. 꼬부라진 혀 놀림이래야 뭔가 그럴듯하다고 추켜세워지는 세태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심장을 쏴라 (0) | 2010.02.07 |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0) | 2010.02.01 |
월든 (0) | 2010.01.17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0) | 2010.01.10 |
철들지 않는다는 것 (0) | 2010.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