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국어선생은 달팽이
지은이 : 함기석
펴낸곳 : 걷는사람
당나귀 도마뱀 염소, 자 모두 따라 해! / 선생이 칠판에 적으며 큰소리로 읽는다 / 배추머리 소년이 손을 든 채 묻는다 / 염소를 선생이라 하면 왜 안 되는 거예요? / 선생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리며 닦아세운다 / 창밖 잔디밭에서 새끼 염소가 소리친다 / 국어선생은 당나귀 / 국어선생은 도마뱀 / 염소는 뒷문을 통해 몰래 교실로 들어간다 / 선생이 정신없이 칠판에 쓰며 중얼거리는 사이 / 염소는 아이들을 끌고 운동장으로 도망친다
표제작 「국어선생은 달팽이」(13 - 15쪽)의 도입부다. 해설 「소년 시대, 단일 주체가 사라지는 방식에 대하여」에서 시인 이수명은 “사물과 언어의 항이 늘 함께 움직이는 함기석의 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4부에 나뉘어 62시편이 실린 시집은 해설까지 200여 쪽으로 두터웠다. 1쪽 분량의 「죽음과 소녀」부터 5쪽 분량의 「행위 3」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의 시편들은 2 - 3쪽 분량이었다.
나는 시론(詩論)이라 할 수 있는 시산문집(詩散文集) 『고독한 대화』(난다, 2017)로 시인을 먼저 만났다. 수학전공자답게 부제는 ‘제로(0), 무한(∞), 그리고 눈사람’이었다. 3부의 소제목은 ‘제로(zero) 속의 무한(無限), 무한 속의 제로’였다. 단락은 ‘0(零)과 ∞(無限)’, ‘x(곱셈)과 ÷(나눗셈)’, ‘f(x, y)=0, x₂+1=0' 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렇다. 시인이 펴낸 동시·동화집은 어린이들이 수학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풀어썼다.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은 1998년에 《세계사》에서 출간되었다. 절판된 시집을 《걷는 사람》이 복간본시선 시리즈 〈다;시 005〉로 재출간하였다.
초중고 국어선생과 대학의 언어학, 국문학 교수를 통틀어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선생은 고교 1년 때의 국어선생이었다. 국어선생은 멍게라고 불렸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첫 발령지로 나의 모교에 부임한 선생은 얼굴이 여드름투성이였다. 별명이 멍게가 되었다. 선생의 시험출제 방식은 촌놈들에게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첫 시험 결과는 참담했다. 70%가 빵점이었다. 두 문제만 맞혀도 열손가락 안에 들었다. 중학까지 객관식 사지선다형에 중독된 촌놈들은 주관식 문제를 접하고 기절초풍했다. 내가 지금까지 한자를 어렵지 않게 해독할 수 있는 힘은 순전히 선생의 가르침이었다. 선생이 우리에게 부여한 숙제는 가혹했다. 4대 신문의 사설 하나를 택해, 매일 대학노트에 오려 붙이고 음(音)을 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