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미각의 제국

대빈창 2020. 3. 5. 07:00

 

 

책이름 : 미각의 제국

지은이 : 황교익

펴낸곳 : 따비

 

출판사 로고가 특이하다. 대전에서 발견된 후기 청동기시대 또는 초기 철기시대(서기전 3세기경)의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라는 청동제 의기(儀器)의 뒷면에 새겨진 밭가는 남자를 모티브로 한 이미지였다. 표제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에서 따왔다. 즉 이 땅에 횡행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미각味覺 기준에서 버팅기는 저자만의 미각의 ‘제국’을 뜻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맛집 순례를 가자미눈으로 흘겨보았다. 배고픈 고생을 안 해 꼴갑을 떤다는 시건방진 눈초리였다. 나의 블로그에 포스팅된 글은 1300개가 되었다. 그중 맛집 글은 달랑 〈옥동식 돼지곰탕〉이 유일했다. 다산 정약용은 말했다. “세상에 오직 하나 속일 것이 있으니 바로 자신의 입이다.” 그렇다. 철갑상어의 알(블랙 캐비어)이나 커다란 상추쌈이나 뱃속에 들어가면 똑같다는 말이다.

모두 84꼭지로 이루어진 한두 쪽의 글들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지만 제대로 된 레시피, 사진 한 장 없었다. 저자는 단순히 맛있는 식당 소개가 아닌, 음식 맛의 중심은 무엇인지를, 맛에 대한 지식과 분별을 다루었다. 맛 칼럼니스트의 먹을거리에 대한 비판은 따끔했다. ‘추어탕이 옛 맛이 아닌 것은 재료의 변화 탓만은 아니다. 미꾸리든 미꾸라지든 주재료는 조금만 넣고 여기에 구수한 맛을 더하기 위해 콩가루며 들깨가루를 잔뜩 넣었기 때문이다.’(61 - 62쪽) 나의 어린 시절 동물성 단백질의 유일한 공급원은 추어탕이었다. 시골 까까머리들은 주말이면 반도를 들고 한강 지류가 사행천으로 흐르는 들판에 몰려다녔다. 수로에 그물을 몇 번 담갔다 들어 올리면 양동이에 미꾸라지와 붕어가 가득했다. 마을로 돌아온 아이들은 엄마 손을 빌리지 않고 너끈히 추어탕을 끓여냈다. 커다란 양은솥에 장작불을 지폈다. 굵은 소금 벼락을 맞은 미꾸라지가 덮은 바가지를 두드려댔다.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와 들깻잎과 애호박과 통미꾸라지를 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려 봉지국수를 풀었다. 아이들은 양은솥에 둘러앉아 자연산(?) 추어탕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더운 계절을 보냈다.

책을 잘 만났다. 되먹지 못한 지자체의 특산물 광고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요즘 저자의 쓴소리가 반가웠다. “우리 지역에서 궁궐에 진상을 많이 하였다.”라고 자랑하는 것은 “우리 지역에 가렴주구가 횡행하여 백성이 굶주리고 도탄에 삐졌다.”(193쪽)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자의 정곡은 매서웠다. 진상품은 공출일 뿐이었다. 그동안 시덥지않게 여기던 음식에 대한 나의 편견을 일깨워 주었다. 저자의 책 두 권이 문고판으로 엮였다. 손길을 기다리는 『한국음식문화 박물지』가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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