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

대빈창 2022. 7. 22. 07:00

 

책이름 : 아무도 하지 못한 말

지은이 : 최영미

펴낸곳 : 해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책장을 훑어보았다. 유럽 도시를 여행하며 만난 미술사적 거장들과의 대화로 부제가 ‘최영미의 유럽일기’인 『시대의 우울』(창작과비평사, 1997), '시인 최영미의 서양미술사 읽기' 『화가의 우연한 시선』(돌베개, 2002), 1980년대의 암울했던 현실을 도발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4) 세 권의 책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세 권 모두 초판이었다. 시인의 책을 잡은 지 20 - 25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시인은 시집, 산문집, 소설을 꾸준히 발표했으나 나는 저만큼 멀리 떨어져있었다. 시인이 다시 나의 뇌리에 접속된 계기는 문단의 성폭력을 고발한 시 「괴물」 때문이었다. 시는 한국의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결정적으로 촉발시켰다. 나는 시인의 최근작 산문집을 군립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그리고 이 년 만에 손에 펼쳤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2020)은 지난 4-5년간 신문·잡지에 기고했던 글과 SNS로 독자와 소통했던 짧은 글, 일기 등 총 122꼭지의 이야기를 5부에 나누어 시간순으로 배열했다. 표지그림과 본문의 삽화 25개는 일러스트레이터 백두리의 작품이었다.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조각 두 점이 눈길을 끌었다. 글들은 80년대 민주화운동 회상, 촛불시위 참가와 응원, 문단의 미투운동을 이끄는 외로운 투쟁 등. 소소한 일상으로 베스트셀러 시인이 ‘근로장려금 대상자’인 이 땅의 열악한 문인복지, 1인출판사 《이미》 설립, 치매노모 간호 등을 다루었다.

시인은 |작가의 말| 「그래도 봄은 온다 폐허에도 꽃은 핀다」에서 “나의 가장 밑바닥, 뜨거운 분노와 슬픔, 출렁이던 기쁨의 순간들을 기록한······ 시시하고 소소하나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시대의 일기”로 읽히기를 바랬다. 나의 눈길이 오래 머문 꼭지는 「자본 1」이었다. 그 시절 금서였던 출판사 《이론과실천》이 펴낸 『자본』을 나도 손에 넣었다. 물론 나의 인식 능력으로 턱없는 오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숫자만 나와도 머리에 쥐가 나는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분석을 잡다니. 90년 겨울 안산공단으로 향하는 보잘것없는 이삿짐 한구석에 책이 들어있었다. 안산을 떠나 구로로 향하면서 나는 걸치적거리는 책들을 ‘지역노동자문학회준비모임’에 기증했다. 이 땅 최초의 『자본론』은 시인을 비롯한 서울대 80학번으로 스물다섯 살의 젊은이 다섯 명이 초역을 맡았다. 초역 팀의 아지트는 시인의 7.5평의 과천 독신자 아파트였다.

시인은 그 시절 한국 학생운동의 비합법투쟁조직 CA(Constitutional Assembly) , 제헌의회 그룹의 사회주의 원전 번역팀의 일원이었다. 대학원 선배들이 교정을 보았다. 그들은 혁명에 기여한다는 소명의식으로 원고료도 없이 하루 종일 외국어와 씨름했다. 책은 87년 6월 국민대항쟁이후 7-9월 노동자대투쟁이 끝나갈 무렵 나왔다. 시인이 SNS에서 만남을 주선했고, 동지들은 30년 만에 서교동의 식당에 모였다. 마지막은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시선 121)에 실린 「자본론」(101쪽)의 전문이다.

 

맑시즘이 있기 전에 맑스가 있었고

맑스가 있기 전에 한 인간이 있었다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토요일 저녁 쏟아져나오는

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들을 집요하게, 연민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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