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자본주의의 적
지은이 : 정지아
펴낸곳 : 창비
소설을 손에 잡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없었다. 오래되었다. 나는 해마다 장편소설은 『세계문학상수상작품집』으로, 중․단편소설은 『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으로 문학적 갈증을 해소시켰다. 십여 년 전, 문학상작품집에 손을 떼고 이시백과 최용탁 소설을 즐겨 잡았으나, 그마저 점점 멀어져갔다. ‘정지아, 하면 빨치산의 딸을 떠올리는 독자들이 대다수’(9쪽) 그렇다. 나에게도 작가 정지아(鄭智我, 1965- )는 1990년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두 권의 『빨치산의 딸』로 기억되었다.
정지아의 소설은 문학상수상작품집을 통해 두세 편의 단편을 읽었을 뿐이다. 96년 『신춘문예당선작품집』에서 「고욤나무」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빨치산의 딸이 하필이면 조선일보라니. 당시 그녀는 주소를 아는 곳이 조선일보 밖에 없어서 그곳에 응모했다고 한다. 인권 르포르타주 『벼랑 위의 꿈들』(삶창, 2013)이 나의 손을 탄 작가의 마지막 책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작가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베스트셀러 정상에 올랐다. 반가웠다. 군립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가장 근래의 작품집 『자본주의의 적』을 대여했다.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해설 「빛과 어둠의 원무 너머」에서 “육중한 주제의식을 무겁지만은 않은 위트와 에피소드로 버무려내었다’고 평한 소설집은 단편 9편이 실렸다. 표제작이자 첫 작품인 「자본주의의 적」은 화자의 대학동기 방현남이 주인공이다. 딸부잣집 둘째로 태어나 이름에도 남男이 들어가 어렸을 적부터 구박덩어리로 그녀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비기로 세상을 살아냈다. 남편마저 그리고 유전자에 각인된 두 아들까지 네 식구는 선천성 자폐가족(?)이었다. 욕망이 거세된 그들이야말로 진정 자본주의의 적이었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은 고향 지리산자락에서 노모를 모시는 소설가의 일상을 후배 시인이 페북에 ‘진정한 소확행’으로 떠벌리며 텃밭사진을 올렸다. 서울 유력일간지 문화부 기자의 인터뷰 취재가 잡히면서 벌어지는 산골마을의 에피소드였다. 「검은 방」은 ‘어둠 저편, 불 밝힌 방 하나 등대처럼 둥실 어둠 속에 떠 있는’(83쪽) 낙향한 딸 방의 불빛이다. 빨치산 출신의 아흔아홉 노모의 과거와 현재가 날줄과 씨줄로 얽혀졌다. 작가의 이름은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아버지의 백아산과 어머니의 지리산에서 한글자 씩 따서 지었다. 그녀 나이 마흔 둘에 딸이 태어났다. 딸은 사상 말고, 그녀가 찾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였다.
「아하 달」은 알래스카 대설원이 터전이었던 늑대를 선조로 가진 개가 화자였다. 개집에 묶여 사는 족보 있는 개는 방심한 탓에 똥개의 씨를 배었고 새끼 네 마리를 낳았다. 산속에서 홀로 사는 알콜중독자 사내가 주인으로 그가 건넨 소주에 취해, 주인을 만난 날의 초승달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짖게 된다. 「애틀랜타 힙스터」는 고급 취향을 내세우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남도 소읍 인구이만칠천이 사는 K의 카페 ‘ㅍ’의 사장 중년여성 윤은 인도에 심취한 도예가. 밴쿠버 작은 시골마을 출신 원어민 강사 존은 굶을지언정 헬리우스 티타늄 팀700 자전거로 폼을 낸다. 화자 스텔라는 애틀란타 시골마을 롬 출신 30대 중반의 원어민강사다. 결말은 정체성을 잃은 젊은이들이 내세우는 취향의 불협화음이 처량했다.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는 커리어우먼을 꿈꾸며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주인공이 골목에서 만난 길냥이가 자기 집에 새끼를 낳고 가출했다. 유투브의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를 틀고 엄마 고양이를 찾아 골목을 헤맨다. 어미가 집을 떠난 것은 새끼의 입에 이가 솟았기 때문이다. 「계급의 완성」은 808호 여자가 선물로 준 유통기한이 지난 유명 백화점의 냉동갈비를 무릎에 올려놓고 버스에 타고 있던 아파트 경비원이 주인공이다. 그는 삼중추돌사고로 정체된 도로에서 롤스로이스 팬덤의 뒷좌석에 앉은 차주의 잘 관리된 분홍빛 발바닥을 보게 된다. 경비원은 갈라터진 자기의 발바닥 억울(?)함에 약국에서 연고를, 올리브 영에서 발관리 도구를, 그리고 풋케어에서 거금을 들여 발바닥 관리를 받는다. 카드명세서에 놀란 아내의 닦달과 아들의 비아냥에 주인공은 제 정신을 찾아 반액을 환불받는다.
「존재의 증명」은 기억상실에 빠진 카페의 한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단골카페에서 에티오피아 하라, 비가 오는 날에는 피페를 마시는 고급 취향을 가진 주인공이 화자다. 의자가 토넷 넘버14, 찻잔은 발퀴레 로시의 블랙리스트. 극소수 마니아만 접근이 가능한 세련된 인테리어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자만이 알 수 있는 커피의 세계였다. 경찰의 도움으로 감시카메라를 조사한 끝에 아파트 211동 701호에 거주한다는 것을 알았다. 경찰의 도움으로 도어록을 따고 이인용 그레이 토고 고급소파에 몸을 던졌다. ‘취향이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 취향이 곧 사람의 본질인 것이다.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242-243쪽)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는 간암 말기환자로 고향집에 내려 와 있는 알콜중독자 사촌동생 기택의 여름 한나절 방문기였다. 먹성 좋고 힘 좋은 기택은 알파벳을 외우지 못했다. 키가 일미터구십이 넘었던 그는 마음 여린 장사였다. 화자가 운동권으로 수배당해 흔적을 감추었을 때 고향의 어머니를 챙긴 것은 기택이었다. 평생 막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자 계급의식이 없다고 무시한 기택과 빨치산 출신 어머니가 모진 세월을 서로 기대며 건너 온 것이다.
빨갱이의 딸(?)이라는 손가락질에 그녀는 어릴 적부터 문학의 숲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레드컴플렉스가 팽배한 이 땅에서 가위눌린 어린 작가는 어머니를 졸라 서울로 전학 갔다. 사춘기의 방황과 염세주의, 중앙대 문창과 입학과 학생운동, 사추위 활동으로 3년간 수배, 자수와 집행유예·······. 작가는 2011년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전남 구례 백운산 자락 무수내로 내려왔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소설을 읽는 내내 훈훈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군립도서관에 입고되었다. 내 손에 들어올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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