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지은이 : 정민
펴낸곳 : 김영사
나의 독서이력에서 가장 빈번하게 접한 파워라이터는 고전인문학자 정민(鄭珉, 1961 - )이었다. 그의 한문학 문헌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린 책들에 나는 깊이 빨려 들어갔다.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는 900쪽 분량의 양장본으로 제법 두꺼웠다. 군립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책씻이를 하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책은 1770년대 중반 서학西學의 태동기부터 천주교 신자 수백 명이 처형당하고 유배를 떠난 1801년 신유박해까지 30년 기간을 다루었다. 탄압과 순교의 역사 위에 가려진 절체절명의 시간을 주요 인물과 조직,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했다. 18세기 조선을 관통한 초기 교회사 연구서였다. 각 부마다 8편씩 12부로 구성되어, 총 96편의 글이 실렸다.
조선후기 대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29-1690)이 높게 평가한 『칠극七克』은 예수회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 신부가 1614년 북경에서 출판했다. 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한문본으로 18-19세기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여부를 떠나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이용휴, 노긍, 홍길주 등. 한국 천주교 최초의 호교론護敎論이자 불후의 명저로 알려진 『성교요지聖敎要旨』는 『만천유고』에 수록되었다. 4언체 한시 형식의 글은 그동안 초창기 조선교회를 이끈 이벽의 저술로 알려졌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m. A. P. Martin, 1827-1926) 목사가 1863년 중국 선교사 교육교재로 개발 간행한 『인자신법認字新法 상자쌍천常字雙千』을 주서까지 통째로 베낀 것이 밝혀졌다.
숭실대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만천유고蔓川遺稿』는 한국교회 최초의 첫 영세자 이승훈의 문집으로 알려졌다. 초기 천주교회의 성전聖典으로 70여 년 간 대접받은 책은, 어이없게 교활한 악마의 편집이었다. 『만천유고』중 유일하게 이승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만천시고」의 71수 한시는 광주나 용인 근처에 살던 어떤 문인의 시, 이승훈보다 100년 전에 살다 간 홍석기의 시 3수, 이승훈이 죽고 15년 후에 태어난 양헌수의 시 26수를 짜깁기하고, 중간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이벽으로 바꿔치기했다. 20세기 이후에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로 베끼고 짜깁기한 책이었다.
다산은 1801년 2월 10일 의금부 국청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검거된 정약종의 문서더미에서 ‘정약망(丁若望)’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심문관이 누구냐고 따져 묻자 다산은 ‘제 일가 중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딱 잡아뗐다. 약망은 다산의 세례명인 ‘요한’이다. 1795년 5월 11일 배교자 한영익의 고발로 주문모 신부는 체포 직전의 상황에 놓였다. 포졸들이 계산동의 천주당을 덮쳤을 때 귀신이 곡할 노릇처럼 주문모 신부가 사라졌다. 마침 밀고 현장에 있었던 다산이 급히 신부를 도피시켰던 것이다. 1787년 성균관 시험에서 제사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자 다산은 백지를 제출했다. 2021년 3월 11일 초남이 성지 빠우배기 성역확 작업도중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 윤지현의 무덤과 유해가 발굴되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에서 망자의 인적사항을 적은 직경 15㎝ 크기의 사발이 수습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지석誌石의 글씨는 다산이 썼다. 다산은 배교背敎를 선언하고도 드러나지 않게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1790년 9월 12일 증광시增廣試 합격자 중 노인과 소년 5명씩 10명은 임금 앞에서 한차례 더 시험을 치렀다. 최연소 합격자 16세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 다시 1등의 영예를 안았다. 정조는 황사영을 손목을 잡고 말했다. “네 나이가 스무 살이 넘으면 바로 벼슬길에 나와 나를 섬기도록 해라” 1980년 9월 2일 경기 양주 장흥 부곡리 속칭 ‘가마골’의 흥복산 자락의 황사영 무덤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비단토시 조각이 나왔다. 임금의 각별한 총애와 어수(御手)가 닿았던 손목에 평생 감았던 비단이었다. 황사영은 그 일이 있고 몇 해 뒤 임금대신 천주의 길을 택했다.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 1956-1801)은 평생 배교背敎를 반복했다. 그는 1791년 11월 8일 의금부 공초에서, 1785년 3월 을사추초 적발(명례방 천주교 신자들의 미사집전이 순라꾼들에게 발각된 사건) 직후 배교를 선언하면서 전향서인 벽이문闢異文과 이단을 배척하는 시, 벽이시闢異詩를 지었다. 1795년에도 서학을 배격한 장문의 논설 유혹문牖惑文을 지었다. 또한 1787년 정미반회 산건과 1791년 평택현감 당시 공자 사당에 배례를 거부한 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고전인문학자는 말했다.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천주교의 양반과 종이 절대자 앞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사상은 도덕과 윤리, 신분제도, 왕조의 시스템 자체를 뿌리로부터 뒤집는 것이었고, 많은 지식인들의 사상에 은밀하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