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산경표를 위하여
지은이 : 조석필
펴낸곳 : 도서출판 산악문화
초판 1쇄가 1993. 11.에 나왔다. 내가 잡은 책은 1995. 10. 초판4쇄였다. 책술에 인천 부평 한겨레문고의 심벌마크가 파란잉크로 찍혔다. 1997. 5. 28. 구입 날짜가 붉은 잉크 고무인이 선명했다. ‘5월 광주’가 떠오르는 계절, 그해 봄날 나는 대처에 나가 부피 얇은 이 책을 손에 넣었다. 부록으로 〈백두대간 개념도〉가 딸려 있었다. 그때 나는 김포 한들고개 언덕꼭대기 집에 살았다. 대문간 사랑채가 나의 방이었다. 나는 지도를 앉은뱅이책상 정면 벽 위에 부착했었다. 책을 읽다가, 상념에 젖어들다가, 농사일을 하고 몸을 씻고 방에 들어왔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지도에 눈길을 주었다.
산악인․지리연구가 이우형(1935-2010)은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여암旅庵 신경준(1712-1781)의 〈산경표〉를 복원했다. 족보 식으로 우리나라 산의 계통을 정리한〈산경표〉는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한 우리 고유의 지리인식 체계였다. 잊혀졌던 우리 민족의 지리 인식 체계를 널리 알린 이는 의사․산악인 조석필(1953- )이었다. 그는 자비로 『산경표를 위하여』를 찍어내 산악인들에게 알렸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보완한 『태백산맥은 없다』를 1997. 4. 펴냈다. ‘백두대간’ 개념이 세상의 빛을 보기 까지 두 사람은 온갖 애를 썼다.
책은 1부 ‘산경표 이야기’는 총론이었고, 2부 ‘호남정맥 보고’는 다섯 마당으로 꾸며진 호남정맥 종주등반 보고서였다. 이 땅의 산맥 개념은 1903년 일본 지리학자 고또 분지로(小藤文次郞)가 땅 속의 지질구조선에 근거하여 땅 위의 산들을 분류한 것을 여적 쓰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산경표山經表〉 원리의 시작과 끝은 ‘山自分水嶺’으로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였다. 우리나라 산줄기는 대간大幹 1, 정간正幹 1, 정맥正脈 13개로 총 15개였다. 분류체계를 정의하는 강들은 모두 10개인데, 길이 내지 유역면적량의 10대 강이 빠지지않고 고스란히 등장했다. 압록강, 한강, 낙동강, 대동강, 두만강, 금강, 임진강, 청천강, 섬진강, 예성강.
1769년 간행된 실학자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는 실학이 절정을 이룬 18세기의 시대적 산물이었다. 산경표는 이 땅의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그린 지도였다. 또한 우리 전래의 지리 인식이었다. 이 땅은 ‘하나의 산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2부는 필자가 열 달 걸려 종주답사한 산줄기 ‘호남정맥’에 관한 종합적인 기록이었다. 호남정맥은 영취산에서 백운산까지 462㎞였다. 그 시절 나의 머릿속은 ‘백두대간’ 개념으로 들끓었다. 연이어 『태백산맥은 없다』를 잡았다. 시인 이성부(李盛夫, 1942-2012)는 8년 여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쓴 연작시 ‘내가 걷는 백두대간’을 담은 시집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창비, 2005)를 펴냈다. 마지막은 백두대간을 사랑했던 시인의 「산을 배우면서부터」의 부분이다.
산을 배우면서부터 / 참으로 서러운 이들과 외로운 이들이 / 산으로만 들어가 헤매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 느껴질 때는 이미 / 그것들 저만치 사라지는 것이 보이고 / 산과 내가 한몸이 되어 /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 잊어버렸을 때는 / 머지않아 이것들이 가까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