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지은이 : 허만하
펴낸곳 : 문학동네
『허만하 시선집』(솔, 2005),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최측의농간, 2016). 그동안 내가 잡은 시인의 책은 단 두 권이었다. 나에게 시인의 대표시집은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였다. 뒤늦게 시인을 만났고, 온라인서적 중고코너도 뒤적였지만 시집을 구할 수 없었다. 시선집으로 갈증을 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출판사 〈문학동네〉의 복간시집 시리즈 ‘문학동네포에지’ 8차분 열권이 쏟아졌다. 시집의 장정이 좀 더 세련되었다. 파스텔톤 표지는 여전했으나 가볍고 투명한 커버가 한 겹 더 씌워졌다. 詩歷 반세기를 훌쩍 넘긴 노시인의 시집이 반가웠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이 나온 지 무려 3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인은 30년 간극을 이렇게 말했다. “지하의 갱 안에서 일하는 광부처럼 그늘에서 시 쓰기를 지속하며 시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시인 허만하(1932- )는 1957년 『문학예술』 추천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1969년 첫 시집 『해조』를 출간했다. 30년 만의 두 번째 시집 출간이후 시인은 3-4년 주기로 꾸준하게 신작 시집을 펴냈다. 복간 시리즈는 해설․발문․추천사가 일절 없었다. 간략한 시인의 약력과 자서뿐이다. 앞부분에 ‘시인의 말’ 초판본, 재출간본 두 편이 실렸다. ‘문학동네포에지 72’ 시집은 그나마 ‘시인의 말’로, 1999년 가을에 쓴 「K에게 드리는 편지」 하나뿐이다. 시인은 그 시절 이렇게 말했다. “시의 순결이 사라지고 있는 이 무잡한 시대에 시집 없는 시인으로 남는 것이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작품 자신이 만들어내는 독자를 만나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6부에 나뉘어 모두 74편이 실렸다. 시편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했고, 나는 손 가는대로 긁적였다. 시인 박남수, 김수영,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르튀르 랭보, 존 던, 에드거 앨런 포 / 화가 박수근, 조선 화가 최북, 모딜리아니, 빈센트 반 고흐,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작곡가 루드비히 폰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4부 9편의 詩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소재로 삼은 연작시였다. 내가 잡은 산문집의 표제는 「낙타는 10리 밖에서도」(64-65쪽)의 2연 1․2행이었다. 표제는 「프라하 일기」(26-27쪽)의 2연에서 따왔다. 마지막은 시집을 여는 첫 시 「지층」(13쪽)의 전문이다.
연대기란 원래 없는 것이다. 짓밟히고 만 고유한 목숨의 꿈이 있었을 따름이다. 수직으로 잘린 산자락이 속살처럼 드러낸 지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총 저수면적 7.83평방킬로미터의 시퍼런 깊이에 잠긴 마을과 들녘은 보이지 않았으나 묻힌 야산 위 키 큰 한 그루 미루나무 가지 끝이 가을 햇살처럼 눈부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라져라, 사라져라, 흔적도 없이 정갈하게 사라져라. 시간의 기슭을 걷고 있는 나그네여. 애절한 목소리는 차오르는 수위에 묻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