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해방일기 4
지은이 : 김기협
펴낸곳 : 너머북스
『해방일기 4』는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새로운 ‘좌우합작’ 움직임, 미군정의 노골적 공산당 탄압 ‘정판사위폐사건’. 이북의 북조선노동당 창당으로 좌익의 주도권은 평양의 김일성으로 넘어가면서 입지가 좁아진 남로당의 박헌영은 극좌노선을 택했다. 80여년 전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역사학자는 오늘날 그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이 땅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4권의 부제는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으로, 시간대는 1946. 5. 1 ~ 8. 30. 이었다. 차례는 6장으로 구성되었고, 각 장의 말미에 실은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는 저자와 안재홍 선생과의 가상대담이었다. 서문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에서 말했다. “이북에서 공산당과 임시인민위원회 중심의 개혁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 이남은 좌우대립이 극단화되어 한민당-김구-이승만 극우세력이 외연을 키우고, 박헌영의 극좌파가 좌익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중도세력은 움츠러들고 있었다.”
1장 미소공동위원회 무기 휴회(1946. 5. 2 ~ 6). 지나치게 탐욕적이고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가진 미군정 간부들. 일본주둔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Dauglas MacArthur, 1880-1964), 그 휘하 주한 미군 하지 사령관과 아놀드 군정장관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전후하여 미국의 공식 외교노선이던 소련의 협력 정책을 전복시키려고 온갖 무리한 짓 감행. ‘전범’ 재판이 도쿄에서 진행되고 이북에서 친일파가 인민재판의 위협에 놓이는 동안 친일 행위와 민족반역 행위의 처단을 가로막은 이남의 미군정.
2장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1946. 5. 10 ~ 30). 1946. 5. 12. 오후 극우파 행사 독립전취국민대회가 끝나고 시위 행렬은 〈자유신문〉, 〈중앙신문〉, 〈조선인민보〉를 습격. ‘정파사위폐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유효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공정성과 거리가 먼 정치적 판결, 고문에 의해 허위진술(자백)에 의거해서 이뤄진 좌익탄압의 절정. 일본 항복당시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약 55억 원으로 미군 진주 전까지 약 30억원을 급하게 찍어내느라고 불량품이 많았으나 미군정은 정품으로 인정.
3장 남북의 분열을 희망할 자 어디 있는가?(1946. 6. 2 ~ 13).1931년 완바오 산萬寶山사건에 관계된 조선인 이주자들은 경작할 땅을 찾아온 생민生民이었지만, 현지 중국인의 눈에는 일본의 위세를 업고 생활 근거를 침식해 들어온 폭민暴民. 남한단독정부 방안을 내놓은 이승만의 1946. 6. 3. 정읍발언. 서울 거주인구는 해방후 1년동안 30퍼센트 증가했으나 물공급을 비롯한 생활조건은 혼란 속에서 파괴, 식량난으로 주민들의 영양상태 악화.
4장 좌우합작 추진(1946. 6. 14 ~ 30). 극우파 중심으로 우익을 결집시키면서 임정 분열과 중도파까지 민전으로 넘어가게 만든 이승만과 김구. 1946년 좌우합작 노력에서 중심이 된 인물은 좌익의 여운형과 우익의 김규식. 재일조선이 귀국할 경우 100킬로그램의 짐과 현금 1천원만 소지, 서울의 쌀 한 말 가격이 오백원. 한민당의 자금력과 공산당의 조직력, 극우파에게 장악된 경찰력 등 폭력적 요소들에 지배받고 있는 조선 남반부. 1퍼센트 미만의 사람들이 통화량의 3분의1을 쥐고, 행정권과 관리권을 가진 미군 장교들을 매수해서 엄청난 폭리를 취한 미군정의 조선은 투기꾼의 천국.
5장 좌우합작 회담과 원칙(1946. 7.1 ~ 28). 김일성은 북조선공산당 지도자로 남조선통일전선이 이루어져 함께 작업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입장, 박헌영은 남조선통일전선에서 주변부로 밀려날 처지. 미군정이 지원하는 좌우합작은 중도우파 중심으로, 좌익은 여운형과 인민당의 위치가 부각. 미군정의 소련과의 교섭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극우 세력 육성으로 더욱 불신의 대상. 이북은 김일성이 장악한 공산당과 중국에서 돌아온 독립동맹이 손잡고 여타 정파를 압도하는 변화의 주체를 형성.
6장 해방 1주년을 돌아보다(1946. 8. 1 ~ 31). 해방공간의 극우파는 민족통일전선 성립을 반대하며 미국에 의존하는 자세를 지속, 미국 극우파의 종속적 존재일 뿐 고유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지 못한 매판세력. 공산당이 창당대회조차 열지 않은 것은 박헌영 중심 당권파의 편의주의성. 1935년 파시즘 대두로 코민테른은 극좌노선을 포기하고 연합전선 정책으로 돌아온 반면, 1928년 코민테른 좌경기에 나온 12월 테제에 얽매인 조선 공산주의자들.
마지막은 행방공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세 인물을 짧게 소개한다. 한국현대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은 식민지 시대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해방 후 공산당과 민전을 떠났다.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남한의 토지개혁을 수행.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자리를 위협, 1959년 7월 사형 당했다. 아나키스트 유림(柳林, 1894-1961)은 사회적 변혁의 필요성에는 어느 좌익 못지않게 공감, 신탁통치를 반대함에는 어느 우익보다 철저.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14년 가까운 투옥으로 해방당시 공산주의자 최고의 권위를 가진 김철수(金綴洙, 1893-1986)는 앞에 나서지 않고 일할 사람을 밀어주는, 해방당시 50세 초반이었던 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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