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지은이 : 고형렬
펴낸곳 : 창비
연어의 회귀를 따라가는 놀라운 장편산문 『은빛 물고기』는 시인 고형렬(高炯烈, 1954- )를, 나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집은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에 이어 세 번째 시집이었다. 시인은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莊子」를 발표하며 문학을 시작했다.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는 시력 40년 시인의 열한번째 시집이었다.
시집을 펼칠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시인의 시세계가 정통 서정에서 한발 벗어난 독특한 위치를 점유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시집은 해설ㆍ발문조차 없었다. 시인 진은영은 표사에서 말했다. “시는 모든 것의 시작과 함께하며 모든 것이 소멸하고 구원받은 뒤, 맨 마지막으로 소멸하고 구원받으리라.” 나는 여기서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떠올렸다. 악도惡道에 떨어져 헤매는 중생, 지옥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중생들 모두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었다.
1974년, 남한에서 가장 북쪽 지역인 현내면에서 / 면서기가 된 나는 내가 / 가장 먼 나라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 지금 사는 곳은 눈 내리는 중부지방 양평읍 /
「중부지방에 살고 있다」(54-55쪽)의 1연과 2연1행이다. 시인은 속초 사진리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하고 가출하여 노동자로 살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면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시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1985년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의 출간은, 국가체제 전복혐의로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시인의 상상력이 발휘된 詩를 군사독재 정권이 옭아맨 것이다. 91년부터 《창비》 편집부에서 일했는데, 쉴 때마다 탄광촌 취재를 다니는 시인을 안기부는 간첩혐의로 연행했다. 연작시로 「비선대와 냉면 먹고 가는 산문시」 두 편이 실렸다. 시인은 냉면을 먹고 돌아오면서 ‘평양?’하고 중얼거렸다. 시인이 살고 있는 양평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시집은 2018년 유심작품상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를 비롯해 4부에 나뉘어 98편의 시를 담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창비, 2015)이후 5년 동안 발표된 150편의 시에서 3분의 2를 실었다고 한다. 시집 말미의 산문 「플랫폼에 내리는 시, 다시 떠나는 열차」는 시인의 시론詩論 이었다. “현실 속에 갇힌 영혼의 기억에게 마음의 기척들이 언어로 나타나길 바란다. 그 비밀의 눈이 떠지지 않는다면 시인의 존재 가능한 사회는 지나간 것”(196쪽) 마지막은 시집을 여는 첫 시 「물고기의 신화」(12쪽)의 전문이다.
새는 노출되어 있고 물고기는 숨어 있다 / 새는 불안하고 물고기는 은자이다 / 그래서 새는 흰 구름이 되어도 좋다고 했고 / 물고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세상이 끝난 뒤 / 물고기는 흰 구름이 될 수 없었다 / 새가 흰 구름이 될 때 물고기들은 새가 되었다 / 사람이 없는 어느 세상에서인가 / 흰구름이 물이 될 때 물고기들은 새가 되었다 /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은 / 저 미래의 끝을 행해 노래하며 죽고 살며 / 흘러갔고 / 나 외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당도했다 / 불안한 곳에 살았던 새들이 구름이 될 때까지 / 흰 구름이 망각하고 물고기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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