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해방일기 7
지은이 : 김기협
펴낸곳 : 너머북스
원고지 18,120매의 방대한 『해방일기』 10권은 일제의 항복 조짐이 보이던 1945. 8. 1.부터 이승만의 권력 사유화로 대한민국이 표류하는 1948. 8. 14.까지 일기체로 써내려갔다.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다. 민족사학자ㆍ독립운동가 안재홍은 중도 우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중도 좌파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까지 포괄하는 좌우연립 정부를 구성했던 인물이었다. 각 장의 말미에 실린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는 저자와 안재홍 선생과의 가상대담이다.
『해방일기 7』의 부제는 ‘깨어진 해방의 약속’으로 ‘미소공위 결렬’을 다루었다. 합리적 보수주의 역사학자는 미소공위가 좌초된 가장 큰 이유를 미국 정책 변화에서 찾았다. 6월말 마셜플랜에 대한 소련의 거부 방침이 확인되면서 소련과의 전면적 대결 정책으로 나선 미국에 책임이 있었다.
7권의 차례는 4장으로 구성되었다. 역사학자는 서문 「냉전의 시작과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에서 말했다. “여운형이 제시한 좌우합작ㆍ남북합작 노선은 김구의 독단적 노선에 비해 외세의 작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민족 내부의 대립을 완화하는, 갈수록 많은 민족주의자의 지지”(10쪽)을 모았다.
1장 “이 박사 지령 앞에 무서울 것이 없다”(1947. 5. 2 ~ 29). 광복군의 두 지도자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은 미군정의 파격적인 지원 아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이청천(李靑天, 1888-1957)은 이승만을 등에 업고 대동청년단을 이끌고 우익 청년운동에서 경쟁. 이남의 여러 정파는 2차 미소공위에서 발언권을 늘리려고 온갖 단체를 만들어 참가 신청, 432개의 단체가 대표한다는 6,481만4백명은 이남 인구의 3배. 젊은이들의 투표를 두려워 한 수구파는 선거법 초안의 선거권 자격을 만 25세 이상으로. 이승만은 분단 건국으로 남조선을 장악한 후 미국의 힘에 기대 북쪽까지 흡수하겠다는 전략.
2장 미소공위, 성공의 희망이 보인다(1947. 6. 1 ~ 29). 남조선 우익 세력이 엽기적인 만25세 연령 제한을 들고 나온 것은 정파 이익을 민주주의 실현에 앞세운 과제. 우익 내에서 경쟁하던 반탁세력이 김구, 이승만의 명성과 한민당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강한 결속력을 과시, 중간파의 합리적 노선은 더 많은 지지를 받으면서도 조직할 수단이 없는. 허헌(許憲, 1885-1951)을 앞세운 박헌영계가 장악한 남로당은 전술의 목적이 좌익의 헤세모니 장악으로 당 외부에 대한 영향력이 위축되는 결과. 조병옥ㆍ장택상 등 군정청의 고위 간부직은 한민당ㆍ이승만 세력과 내통하는 세력이 장악.
3장 여운형의 죽음에서 조선의 현실을 본다(1947. 7. 2 ~ 30). 강경한 반탁론자로 알려졌던 조만식의 상황인식은 이승만의 반탁활동이 미소공위 사업방해 우려, 남한의 토지개혁 필요성 강조. 반탁운동은 1945년 말 모스크바3상회의 직후 〈동아일보〉의 조작기사로 촉발. 한민당의 모든 움직임은 한낱 ‘이익집단’일 뿐으로 친일파를 포함한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한 정략 차원.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체제는 공공기구 경찰의 사병화로 조직폭력단 같은 조직으로 변질되어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찰보다 더 악질적인 범죄 집단. 해방 조선의 인민이 바란 것은 사회경제적 평등에 중점을 두는 사회주의 성향의 민주주의. 기득권층으로 구성된 한민당과 정상배 이승만 세력이 손을 잡고 미국의 후원아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억누르며 세운 것이 대한민국. 1947. 7. 20. 혜화동로터리 부근에서 저격 암살당한 여운형의 사건 정황은 경찰이 개입한 극우파 소행. 1945. 8. 몽둥이 찜질 테러부터 2년동안 열두번의 테러를 당한 끝에 목숨을 잃은 몽양.
4장 미국은 미소공위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1947. 8. 1 ~ 31).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조봉암은 자유당과 한민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지지를 획득. 이승만은 1958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반공법으로 조봉암을 사형으로 제거. 제1야당 민주당이 수수방관한 것은 부작위不作爲를 통한 공범. 해방공간에서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분단정국에 앞장섰던 한민당은 이승만 정권아래에서 제1야당으로 반사이익을 누렸던 전통. 소련은 조선의 변화에 편승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소극적 입장, 미국은 일제강점기 질서를 조선에 복원하는 반동적 노선을 통해 영향력 확보를 적극적으로 추진.
마지막은 책을 읽어나가다 눈길이 오래 머문 오스트리아 신탁통치, 극우파의 정치자금, 반탁운동 세력의 이념 차이를 짧게 서술한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제국을 탈퇴한 것은 독일이 항복(1945. 5. 7)하기 불과 열흘 전으로 연합군이 오스트리아 땅을 점령한 뒤였다. 레너(Karl Renner, 1870-1950) 임시정부는 연합군의 승인을 얻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정치적 전통이 빈약한 오스트리아는 1955년 5월 완전독립을 이룰 때까지 10년 동안 신탁통치를 받았다. 좌익 사회민주당과 우익 기독사회당은 합작 관계를 굳건하게 지켰다.
반탁운동에 힘을 합친 극우 3개 세력은 각자의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었다. 한민당은 재력과 함께 군정청 ㆍ 경찰에 걸치는 인적 자원을 가졌지만 명분과 위신이 없었다. 이승만은 정계ㆍ군부ㆍ언론계에 극우파의 연줄을 가졌지만 국내 기반이 없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권위와 민족주의자로서 명망을 가졌지만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국내기반이 없었다.
1945년 8월 15일에서 9월 8일 사이에 총독부는 30억원의 조선은행권을 급히 인쇄했다. 당시 조선의 총통화량은 55억원이었다. 민간 인쇄소까지 동원하여 불량품이 많은 ‘붉은 돈’을 상인들마저 받기를 꺼려했다. 미군정은 이 돈의 효력을 인정했고, 자금은 친일파에서 극우파로 퍼져나가 삐라 붙이는데, 군중 동원에, 극우신문 운영에 그리고 테러조직에 쓰였다. 미군정은 이 돈을 뒷돈으로 얼마나 받아먹었을까. 민중들은 물가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아사에 내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