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해방일기 8

대빈창 2025. 2. 27. 07:30

 

책이름 : 해방일기 8

지은이 : 김기협

펴낸곳 : 너머북스

 

『해방일기 8』은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 가결, 미국은 미소공위 배제, 안보리 회피로 수적 우세를 자신하는 유엔총회로 조선 문제를 가져갔고, 소련의 동의 없이 한국의 정부수립을 추진. 소련은 조기철군과 조선인의 자주적 결정을 주장하며 유엔 결정을 보이콧. 친일파 집단 한민당과 이승만 정상배 집단은 분단건국에 피치를 가하고, 이북은 혁명기지론으로 맞섰다.

8권의 부제는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으로, 시간대는 1947. 9. 3 ~ 12. 31. 이었다. 차례는 4장으로 구성되었고, 각 장의 말미에 실은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는 저자와 안재홍 선생과의 가상대담이었다. 역사학자는 서문 「분단건국의 길이 뚜렷해져 가고 있는데······」에서 말했다. “민족국가 건설을 바라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분단건국을 반대했다. 친일파 집단은 해방 전에 확보해놓은 기득권을 지키고, 나아가 미국의 비호 아래 더 키워나가려는 속셈이었다. 이승만 등 기회주의적 정상배들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 ‘반공’은 핑계일 뿐이었다.”(10쪽)

1장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1947. 9. 3 ~ 26). 트루먼 대통령 특사 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1897-1987) 중장의 중국ㆍ조선 방문을 계기로 조선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 경직. 출범당시 51개 유엔회원국에서 46개국은 미국 거수기로 소련에 동조할 나라는 5개국이 고작. 1947. 9. 23. 조선 문제 유엔 상정은 41대 6으로 가결. 조선 뿐 아니라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거의 모든 나라 민중이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 경제 조건이 열악해서 자유 경쟁을 허용할 상황이 못되었고, 식민지시대 저항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력과 성망에서 비롯. 임정 원로 이시영(李始榮, 1869-1935)는 정치가가 아닌 순수한 민족주의자로 특정한 정치노선을 주장하지 않고 독립건국을 희구.

2장 미군정이 키워낸 ‘부패공화국’(1947. 10. 3 ~ 31). 종전당시 미국은 유일한 산업국으로, 경제력을 무기로 국제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마셜플랜. 미군정 수뇌부가 부일협력자특별법 승인을 기피하는 것은 부미附美 협력자 중에 부일협력자 출신이 다수였기 때문. 1946년말 군정청과 전재동포후원회가 집계한 전재민의 수는 280만명, 극우단체의 동원력은 이들 룸펜 계층에 근거. 1947년 여름의 남조선은 극한적 정치탄압아래, 좌익을 넘어 비극좌非極左 전체가 탄압대상. ‘경찰의 날’ 10. 21.은 군정청 경무국 설치일.

3장 38선을 굳힌 것은 누구였던가?(1947. 11. 2 ~ 30).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이남에 전력을 제공하면서 전력 대상도 돈이 아닌 현물을 요구하여 동포애 과시. 황해 연백평야는 조선의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대부분의 평야가 38이남에 있었지만 38이북의 구릉지대 저수지(구암저수지는 당시 조선 최대 저수지의 하나)의 물로 경작 가능. 세 갈래 반탁세력에서 민족주의 이념을 지키는 정상적 극우파는 김구세력, 한민당은 반동적 이익집단, 이승만 세력은 권력만을 노리는 정상배 집단. 이북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합작해서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친일세력 배제. 미군은 친일세력을 주축으로 한 친미세력을 키우려고 처음부터 좌익탄압.

4장 어지러워진 김구의 행보(1947. 12. 2 ~ 31). 12각정당협의회를 통해 남북총선거를 주장하던 김구는 이승만의 민족대표자회의와의 통합에 대한 집착으로 남조선 총선거 주장에 화답하여 ‘민족주의의 보루’라는 상징성에 큰 손상. 이남의 발전용량은 최대 20만 킬로와트였으나 실제 생산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전력 생산, 이북은 전기를 무기화하지 않고 안정된 대남 송전을 위해 최선. 해방 시점에서 쌀 한 가마에 20여원이었으나 2년 후에는 6,000원을 넘겼고, 도매물가지수는 세계2위였고 임금지수는 물가지수의 4분의 1에 불과하여 극심한 민생고.

마지막은 책갈피를 넘기다 눈길이 머문 그리스 내전, 베트남혁명을 이끈 호찌민, 도쿄전범재판을 짧게 서술한다. 1944년 10월 독일군이 그리스를 떠날 때 그리스인민해방군(ELAS) 병력은 10만이 넘은 반면 우익 독립군 병력은 2만도 안되었다. 스탈린은 루마니아를 차지하고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인정했다. 영국은 ELAS의 해산과 대량검거로 좌익을 탄압, 1946년 3월 총선에서 그리스 공산당은 보이콧을 선언했고 우익연합이 정권을 차지했다.

호찌민(Ho Chi Minh, 1890-1969)은 제1차 베트남전쟁의 진행과정에서 전쟁발발 전에도 전쟁발발 후에도 프랑스와 타협하기 위해 노력. 김일성은 혁명기지론에 입각해서 이북 지역의 혁명을 서둘러 완성하고, ‘이남’ 지역을 해방시킨다는 전략. 극동국제군사재판정(극동IMI)은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서 약 50개 열렸고 도쿄전범재판정은 그 하나. 극동IMI의 피고인은 5,700여명으로 추산되고 도쿄재판정에 기소된 이는 28명뿐. 재판의 중요한 목적은 일왕 히로히토(裕仁, 1901-1989)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해방공간을 택한 이유를 역사학자는 “당시 형성됐던 구조적 문제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며 짧은 기간 동안 큰 변화가 압축적으로 일어난 시기라는 점, 그리고 정치환경으로 인해 시야에 제한이 있어 왔기 때문에 상식적인 관점이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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