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4·3, 19470301―19540921, 기나긴 침묵 밖으로
지은이 : 허호준
펴낸곳 : 혜화1117
허호준 기자는 말그대로 ‘제주 사람’이었다. 제주에서 태어나, 모든 학업을 제주에서 마쳤다. 그는 1989년 기자를 시작한 이래, 35년 동안 〈한겨레〉 제주기자로 살아왔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 4·3의 진실과 의미를 찾아 뛰어다녔다. 자타가 공인하는 4·3 전문기자였다. 제주도 인구는 현재 70만 명이다. 정부가 인정한 4·3 유족은 10만 명에 이른다. 책은 한 사람의 집요한 4·3 추적의 결과물이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제1회 4·3언론상 본상을 허호준 기자에게 수여했다.
표제의 숫자가 눈에 띈다. 4·3의 첫날과 마지막 날짜였다.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 등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했다. 책은 1947년 3월 1일 관덕정을 울린 총성으로 시작된 첫날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로 끝난 날까지, 4·3이후 오늘을 담았다. 표지사진은 제주 4·3 평화공원내 행방불명인 표석이었다.
책은 4·3 생존희생자, 유족들과 나눈 이야기를 뼈대로 삼아 13장으로 구성되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의 참가자는 2만5천~3만명으로 제주섬 사람의 10명중 1명이 참가했다. 행사를 치른 이들이 관덕정 방향으로 거리행진을 이어갔다.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채여 넘어졌다. 그냥 지나치는 경찰에게 사람들이 항의했다.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발포자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미군정과 경찰은 응답하지 않았다. 제주사회는 동요하고 분노했다. 3월 10일 해방이후 남한사회에서 최초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했다. 미군정은 극우주의자를 제주도지사로 임명했다. 경찰과 서청의 고문과 테러가 제주도를 뒤덮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었다. 350여명의 무장대는 24개 지서 가운데 12곳과 우익단체를 일제히 공격했다. 5월 10일 남한총선거의 선거구는 200곳, 제주도는 3곳이었다.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가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제주도는 남한에서 5·10선거를 거부한 유일지역이었다. 고립무원의 섬,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 5개월여동안 참혹한 학살이 제주도를 휩쓸었다. 4·3당시 12개 읍·면 165개 마을 가운데 소개된 마을은 전체의 53퍼센트에 이르는 87개 마을이었다.
생존희생자들은 증언했다. 성산일출봉 터진목 학살터. 제주4·3 기념성당(중문성당)은 1948년 신사터로 일상적 학살터. 1949년 1월 어느날 누군가의 총에 턱을 잃은 30대 중반의 진아영 할머니는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평생 뒤돌아 앉아 천을 풀고 죽을 떠넘겼다. 무명천 할머니로 불리는 이유였다. 제주국제공항은 1949년 제2차 군법회의 사형수 249명, 1950년 한국전쟁 발발직후 예비검속자들을 집단학살한 뒤 암매장한 현장, 2007~2008년 발굴된 유해는 모두 합쳐 387구였다. 일제강점기 해녀투쟁의 진앙지 연두망동산은 1949년 3월까지 최소 57명을 학살.
정방폭포 절벽위 소남머리 일대는 4·3당시 한라산 남쪽 지역 최대의 학살터. 몇 년 뒤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남아있는 뼛조각들이 훼손되어, 희생자들의 혼을 불러 시신 없는 ‘헛묘’를 만들었다. 제주도 마을 가운데 유일하게 너븐숭이4·3기념관이 있는 북촌리는, 토벌대가 하루 300여명을 한꺼번에 집단학살. 북촌리 비극을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중편소설 「순이 삼촌」으로 형상화. 무장대의 기습공격을 받은 군의 보복학살극. ‘북촌 희생자 합동위령제’ 자료집의 4·3특별법에 따라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수는 631명.
도피한 가족대신 죽인 것을 대살代殺이라고 했다. 토벌대는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들을 학살, 가족 가운데 한 명이라도 집에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내몰렸다. 아들이나 형제가 피신하면 남은 가족들은 도피자 가족이 됐고, 토벌대의 표적이 되었다. 무장대의 습격을 받으면 토벌대는 무장대 대신 도피자 가족을 찾아 총살을 자행했다. 마지막 장의 소제목은 ‘정명正名’이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이 누워있다. 설명문에는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고 적혀있다. 나는 30년 전 학창시절부터 정명正名했었다. ‘제주4·3항쟁’으로.
4·3의 진실과 의미를 찾는데 생을 전력투구한 기자는 에필로그에서 말했다. “냉전체제와 분단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국가 폭력으로 초토화된 땅을 일으켜 세우고, 진실과 화해, 상생이라는 용광로 속에 녹인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350쪽)고. 책은 제주4·3항쟁 75주년인 2023. 4. 3. 초판이 나왔다. 나의 블로그 포스팅 일자는 제주4·3항쟁 77주년 기념일인 2025. 4. 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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